(조선일보 2017.10.21 송태호 송내과의원 원장·의학박사)
의학적으로 스트레스 덜 느껴 '신경성 질환'이 거의 없어
우리 각자가 염치를 키우면 사회 스트레스가 줄어들 텐데
병원이 1층에 있어 가끔 대기실 창밖을 바라본다.
2층에서 내려다본 거리가 추상적이라면 1층에서 보는 거리 풍경은 구체적이다.
우리 병원 앞은 오거리라서 유동 인구가 많다.
하루도 빠짐없이 노점상들이 병원 앞에 진을 치고 있다. 과일장수, 건어물장수, 방물장수, 건과류장수, 화훼장수,
약초장수까지 무척 다양하다. 가만히 보면 자기들끼리 요일을 정해 놓고 나오는 것 같다.
몸을 써서 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분들도 크고 작은 병 몇 개씩은 있고 결국 우리 병원 단골 환자들이다.
병원이 2층에 있을 때 신경 쓰지 않았던 일들 중 하나는 점포 앞 눈을 치우는 일이다.
눈을 치우지 않으면 벌금이 부과된다고 한다. 벌금도 벌금이지만 병원에 방문한 연로한 어르신이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눈이 내리면 병원 앞을 치운다. 눈 치우는 일은 나와 직원들의 공동 업무다. 눈이 온 날이면 30분쯤 일찍 출근해
눈을 치우곤 했다. 올 초에도 눈이 많이 와 조바심을 내며 출근했는데, 어라! 병원 앞 눈을 누가 다 치워 놓았다.
알고 보니 병원 앞에서 노점 하시는 분이 아침 일찍 치워놓았다. 위장병으로 자주 진료받으시는 환자이기도 하다.
어리둥절해하는 나에게 그는 "좀 일찍 나와서 쓸었습니다. 눈이 없어야 저도 장사하니깐요"라며 계면쩍게 미소 지었다.
그 노점상에게 따뜻한 커피 한잔을 건넸었다.
염치는 청렴할 염(廉)과 부끄러울 치(恥)가 합쳐진 한자말이다. 국립국어원 정의로는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고, 단국대 동양학연구소는 '남에게 신세를 지거나 폐를 끼칠 때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상태'를
염치라고 했다. 어쨌든 그 노점상은 항상 우리 병원 앞에서 장사하면서 점포 주인인 나에게 미안한 감정을 갖고 있었기에,
즉 염치가 있었기에 눈을 쓸었을 것이다.
가만 생각해 보니 견과류장수는 갓 볶았다며 땅콩을 가져왔고, 화훼장수는 진료받으러 왔다가 병원 화분이 시들하다며
분갈이를 해 주기도 했다. 돈을 지불하려 했지만 그분들은 한사코 거절했다. 나도 노점상들 물건을 샀는데 어찌 보면
물건이 필요했다기보다 신세를 갚으려는 마음이었던 듯하다. 의사에게 염치 있는 행동이라면 능력이 안될 때 환자를
빨리 치료가 가능한 곳으로 보내는 일일 것이다.
연락처도 없이 불법주차 해놓은 차 때문에 응급실에 가야 하는 아기 부모가 발을 동동 구르고, 여러 사람이 이용하는
시설에서 아이들의 버릇없는 행동을 놔두고, 응급실에서 중환자를 보는 의료진에게 당장 진료해주지 않는다며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모두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모르는 행동이다. 선조들은 염치의 반대말인 파렴치 혹은 몰염치하다는
말 듣기를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 심지어 일반 범죄자보다 파렴치범을 더 비난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의학적으로는 몰염치한 사람들이 더 건강할 수도 있다. 스트레스를 덜 느끼기 때문이다.
몰염치한 인간들은 '신경성 질환'이 거의 없다. 그렇다고 몰염치한 인간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각자 염치를 키우면 사회 전체의 스트레스가 줄어들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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