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12.19 김대중 고문)
"사드 적절히 처리" 어르고 '한국 기자 폭행' 뺨치고 '경제 압박 일부 해소' 달래고
中, 멋대로 한국 갖고 노는데 우리 내부에서 동조하는 세력… 정부의 무지·무능보다 무서워
김대중 고문
'어르고 뺨치고 달랜다'는 말이 있다.
이번 문재인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서 중국 측이 우리에게 한 태도가 바로 그렇다.
시진핑 주석은 "한국 측이 사드 문제를 적절히 처리(중국 측 발표문은 '타당한 처리')하기 바란다"고
어르면서 뒤에서는 한국 기자들을 폭행하고 뒤이어 리커창 총리가 몇 가지 경제적 압박의 해소로
달래주는 과정이 한국을 '가지고 논' 중국 측의 시나리오인 듯 보인다.
문 대통령이 당한 또 다른 홀대들은 그 시나리오의 엑스트라 격(格)들이다.
먼저 문 정부는 중국 측의 이런 시나리오를 알고 갔을까, 모르고 당한 것인가를 묻고 싶다.
알고 갔다면 그렇게 급히 가야 할 이유가 있었나?
이번 방중(訪中)의 시기, 내용, 의전 등에 관해 의문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체로 정상회담은 사전에 의제를 합의하고, 발표할 내용 등을 미리 정하고 하는 것이 관례인데도
무엇이 급해 '시진핑 없는 베이징'에 간 것인가?'
'마지못해 하는' 중국 측을 졸라서 비집고 들어간 것 같은 모양새다.
몰랐다면 이런 참사가 없다. 참모들의 어리석음과 경험 없음만을 탓할 사항이 아니다.
이것은 나라 체통을 망가뜨리고 국가 이익을 저해한 무자격자들의 외교 놀음에 놀아난 꼴이다.
어쩌면 우리 측이 중국 측으로부터 뒤통수를 얻어맞은 경우일 수도 있다.
중국 측이 이렇게까지 우리를 업신여길 줄 몰랐다면 그런 바보 같은 참모진은 당연히 사퇴시켜야 한다.
또 다른 문제는 이번 문 대통령의 방중을 계기로 우리 내부의 분열과 갈등과 시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기자들이 당한 집단 폭행에 대해 문 지지 세력이 보이는 반응은 정부 측의 무지와 무능보다 더 무섭고 아찔하다.
이른바 '문빠'들은 '기자들이 보안을 무시했다'는 중국 측 주장에 동조하며 우리 기자들을 비난하고 있다.
오죽하면 중국의 환구시보가 '한국의 네티즌들은 한국 정치인들과 언론이 들끓는데도 왜 중국에 환호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우리에게 야유를 보내고 있다.
이런 한국 내의 반목은 한·중 관계의 불안정한 현주소나 대통령의 방중에 얽힌 사연보다 더 치명적이며 더 해악적이다.
한국의 여론이 사건마다 둘로 갈려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을 목도한 중국은 이제 어떤 경우라도 한국을 '가지고 놀'
명분(?)과 여유를 갖게 된 것이다.
대통령이 외국에 나가기만 하면, 또는 어떤 외교적 행사를 치를 때마다 청와대는 늘 '성과'와 '업적'을 내세워 왔다.
우리가 잘못한 것은 무엇이며 우리에게 교훈을 준 것은 무엇이며, 다음엔 그런 일을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는,
성숙한 생각들이 보이지 않았다. 역대 정권이 그랬다.
문 정부는 하도 다른 척하길래 좀 다를 줄 알았다.
그러나 어제오늘 '대통령 성과'를 치장하기에 바쁜 것을 보면 그 청와대가 그 청와대다.
우리는 이 기회에 문 대통령이 외교·국방에 어떤 기조를 갖고 임하는지 묻고 싶다.
중국·일본에 포위되다시피 한 우리의 지정학적 상황에서 우리가 살아나갈 방향은 어떤 것인지, 미국 등 주변 나라들과는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외교 철학의 틀을 알고 싶은 것이다.
사드 배치 문제 하나만 가지고도 미국과의 기본 틀이 어긋나고 중국이 우리를 무릎 꿇리려는 이런 바람개비 같은 구조로는
긴 우호의 역사를 이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땅의 5000년 역사는 중국과 일본에 갇혀서 산 역사였다.
두 나라는 간단없이 우리의 나라와 민족을 범하며 조롱하고 핍박하며 백성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았다.
우리는 그들을 넘어선 세계를 몰랐고 알아도 그것을 넘을 용기와 의지가 없었다.
그 굴종의 역사는 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더불어 기회의 역사로 바뀌었다.
우리는 동북아 대륙의 한 귀퉁이 '감옥'을 벗어나 미국의 도움으로 비로소 세계로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 70년 우리는 중국과 일본의 굴레를 벗어나면서 우리 역사상 유례가 없는 발전과 도약의 길을 걸었다.
이제 동북아의 정세는 중국과 일본이 복고적 지위를 확보해서 다시 70년 그 이전으로 회귀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우리 역시 '반미(反美)'의 기운을 내걸고 중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동북아의 좁은 감옥으로 되돌아가려는 퇴행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는 한, 이웃인 중국과 일본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고 그들과 공존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공존은 우리가 미국 등 역외 주변과 안보적 관계를 공고히 할 때 보장된다.
더욱이 세상은 이제 힘 있고 돈 있다고 이웃을 물리적으로 무릎 꿇리고 군사적으로 침범하는 것을 쉽게 용납하지 않게끔 됐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결코 문 대통령이 말한 '작은 나라'가 아니라는 자존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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