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조선의 두 사신, 목숨 걸고 청나라에 대항한 결과

바람아님 2017. 12. 27. 09:18
[중앙일보] 입력 2017.12.26 15:08

홍타이지, 후금서 청으로 국호 바꾸고 청 태종 즉위
황제 즉위식에 사신으로 간 두 사람, 황제 하례 거절
지정학적 조선 가치 알아본 홍타이지, 국서 줘 돌려보내
귀국한 사신들 오히려 "황제 참칭 국서 받았다"고 귀양


조선 사신 나덕현과 이확, 목숨 걸고 청나라에 저항하다 
자는 헌지(憲之), 호는 장암(壯巖)인 나덕현은 나주 나 씨 직장공파 출신의 강직한 인물이었다. 그의 집안은 유교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실천했다. 이성현감(尼城縣監)을 지낸 아버지 나사침(羅士忱)을 시작으로 3대에 걸쳐 ‘이효 이정 사열(二孝 二忠 四烈)’, 즉 충신 두 분, 효자 두 분과 열녀 네 분을 배출했다. 이를 삼세팔정(三世八旌)이라고 한다. 유교의 최고 가치인 3강(三綱), 즉 충(忠), 효(孝), 열(烈)을 실천해 조정으로부터 한 집안에서 3대에 걸쳐 여덟 분이 정려(旌閭)를 받은 것을 가리킨다.  

 
정려는 충신, 효자, 열녀에게 임금이 하사한 편액을 마을 입구에 걸어 사람들의 귀감이 되게 했던 것을 말한다. 나사침과 나사침의 손자 나득소(羅得素)(나사침의 넷째 아들인 나덕현(羅德顯)의 셋째 아들)는 효자로 정려를 받았다. 나사침의 장남 나덕명(羅德明)과 여섯째 아들 나덕헌(羅德憲)은 충신으로 이를 받았다. 나사침의 딸이자 윤항(尹沆)의 부인, 넷째 아들 나덕현의 처 하동 정씨(河東鄭氏), 나사침의 둘째 아들 나덕준(羅德峻)의 딸로 김초(金礁)의 부인, 나덕헌의 장남 나수소(羅守素)의 처 언양 김씨(彦陽金氏)까지 두 명의 딸과 두 명의 며느리가 열녀로 정려를 받았다. 이에 전라도 유림들이 나서서 나사침의 호를 딴 사당인 금호사(錦湖祠)를 세웠고 가까운 곳에 삼강문을 세워 지금에 이르렀다. 나덕현은 처가 열녀에, 아들이 효자다.  
 
나주 정씨의 시조 나부(羅富)는 송나라 예장(豫章) 사람으로 알려졌다. 고려 시대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고려에 왔다가 송나라가 무너지면서 귀국하지 못하고 고려에 귀화했다고 한다. 나부는 궁성 수비를 담당하는 감문위상장군(監門衛上將軍)을 지냈다. 나주 나씨 집안은 강직하면서도 덕이 많아 호남의 명문 집안으로 자리 잡았다.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너그러운 것이 집안 내력인 셈이다.  
 
이확(李廓,1590~1665년)은 전주 이씨로 무신이다. 임진왜란으로 3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광해군 때 무과에 급제했으며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해 그 공으로 평산 부사가 됐다.  
 
[사진 네이버 영화]

[사진 네이버 영화]

 
이렇게 심양으로 향한 조선의 사신들은 홍타이자가 국호를 후금에서 대청으로 바꾸고 황제에 즉위하는 행사에 참가했다. 스스로 황제임을 선언한 홍타이지는 외국 사신들에게 황제에게 하는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즉 세 번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면서 아홉 차례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요구했다. 하지만 조선 사신은 이를 거절했다. 명나라 황제만 사신으로 인정할 뿐 홍타이지를 황제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청나라 자체를 황제의 나라를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병해 위기 탈출을 도운 명나라를 계속 황제의 나라로 여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는 홍타이지의 권위에 대한 공격이나 다름없었다. 명나라를 정복할 꿈을 꾸고 있는 홍타이지의 심중에 정면으로 도전한 셈이다. 조선 사신들은 목숨을 걸고 인조와 조정의 지시에 따랐다. 이제 목에 칼이 들어오는 일만 남았다. 조선 사신이 하례를 거부하자 청나라 관리와 무장들이 달려들어 구타를 하면서 이들은 옷이 찢어지고 갓이 부서지는 수모를 당했다. 사신에 대한 폭력은 자신들의 뜻대로 사신을 움직이기 위한 중국의 전통적인 방식인지 모르겠다. 
 
선양 북능공원에 있는 청 태종 홍타이지의 동상 [사진 중앙포토]

선양 북능공원에 있는 청 태종 홍타이지의 동상 [사진 중앙포토]

 
홍타이지는 조선 사신들의 목을 베자는 제안을 물리쳤다. 오히려 사신들에게 선물을 안기며 국서를 들려 보냈다. 귀국 길에 호위 기병을 붙여주기도 했다. 지리적으로 자국의 배후에 해당하는 조선을 다독거리지 않으면 필생의 꿈인 중국 정복에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러 떠난 사이 조선이 후방을 공격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청나라에 저항했던 이들은 귀국하자 오히려 탄핵 위기에 처했다.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등 언론을 담당하는 삼사(三司)와 유생들이 사신들이 황제를 참칭(僭稱)하는 청나라 홍타이지의 국서를 받은 것 자체가 모욕적이라며 처벌을 요구한 것이다. 척화론자들에게 역적으로 몰린 셈이다. 영의정 김류(金瑬)까지 처벌을 요구했다. 역적은 사형이다. 하지만 현실주의자인 이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이 변호하는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삭탈관직과 귀양은 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병자호란 이후 이들이 심양에서 하례를 거부하며 저항한 것이 강조돼 귀양에서 풀려나 복직했다. 
 
병자호란 때 조선을 침략했던 청 태종과 효단문황후의 심양 북릉. 2004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사진 중앙포토]

병자호란 때 조선을 침략했던 청 태종과 효단문황후의 심양 북릉. 2004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사진 중앙포토]

 
후금이 청나라로 바뀌는 과정에서 심양에 사신으로 간 이 두 사람의 사연은 오늘날에도 많은 울림을 남긴다.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