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1.19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교수)
[김시덕의 종횡무진 인문학]
근현대 한국 쌀의 사회사
곡물은 정치와 깊은 관련이 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건너온 고구마가 한반도 민중을 살렸다.
역시 아메리카 대륙에서 아일랜드로 건너가 수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던 감자가 흉년이 들자,
아일랜드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쌀도 마찬가지로 정치적이다.
19세기 말 일본 민간 농민들이 개발한 신품종 쌀에는 '애국'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식민지 시대에 이리, 지금의 익산에서 개발된 쌀은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의 이상을 나타내는
'팔굉(八紘)'이라 불렀다. 그리고 식민지 시대에 교배가 시작돼 해방 후 육성이 완료된
쌀에는 '새나라'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신품종 쌀은 '통일벼'였다.
통일벼를 성공시킨 것은, 정치적 안정을 꾀하는 박정희 정권과 굶지 않고 잘살아보겠다는
시민의 공통된 꿈이었다. 통일벼가 맛이 없다느니, 통일벼 때문에 토종 벼 품종이 사라졌다느니 하는 비판을 흔히 하지만,
절대적 굶주림이 사회에 존재하던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배부른 소리다.
김태호 박사는 '근현대 한국 쌀의 사회사'(들녘)에서 "통일벼가 진지한 학문적 탐구 대상이 되지 못하고 독재 정권기의
수많은 사건 가운데 하나 정도로 이야기"되는 데 그침을 반대한다. "이 시기의 농민과 농업 행정가와 농촌 운동가들은
자신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다는 긍정적 믿음과 열정을 안고 자신의 자리에서 헌신"했으므로.
그런데 통일벼의 밥맛을 개선한 '유신벼'라는 신품종이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큰 기대를 받으며 1976년 전국적으로 재배됐으나, 첫해에 큰 타격을 받아 농민들 반발이 컸다.
그러나 차마 "유신이 실패했다"고 말할 수 없던 당시 분위기 탓이었는지, 이 실패는 거의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채
시장에서 퇴출당했다.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교수
이런 맥락에서 통일벼와 유신벼는 5·16 군사정변과 10월 유신이라는 서로 다른 두 사건으로
대표되는 박정희 시대의 모순적 성격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통일벼의 성공과
유신벼의 실패로 상징되는 현대 한국 쌀의 역사를 살피면서 "과거에 대한 일방적인 미화로도,
전면적인 부정으로도 흐르지 않고 이 시대에 땀 흘려 일했던 이들의 목소리를 균형을
잃지 않고 되살려"냈다.
저자는 다짐하듯 말한다. "글자로 적힌 사건들 뒤에 깔려 있는 사람들의 땀과 눈물에 대해서는 예의를 잃지 말자"고.
겸허한 자세를 유지하고 상대에게 예의를 지키기. 좌우,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현대 시민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이다.
'벼를 사료 삼아 쓴 한국 현대사'인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 번 다짐하게 된다.
근현대 한국 쌀의 사회사 524.2-ㄱ971ㄱ/ [양천]책누리실(2층) |
책소개 『근현대 한국 쌀의 사회사』의 뼈대는 서울대학교 대학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쓴 박사학위논문 《'통일벼'와 1970년대 쌀 증산 체제의 형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통일벼의 연구와 보급이 최근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므로, 생존한 당사자들을 인터뷰하는 것은 연구에서 대단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고 밝히며 과학적 농학의 전개, 통일벼의 전면적 보급을 둘러싼 논란, 통일벼에 수용의 지역적 편차 등의 연구 내용을 정리하였다.
한국 과학기술사를 전공했다. 식민지 시기 일본에서 합성섬유 “비날론”을 발명하고 뒷날 북한에서 그 공업화를 주도한 화학공학자 리승기에 대해 석사논문을 썼고, “통일벼”의 개발 과정과 한국의 쌀 증산운동에 대해 박사논문을 썼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방문연구생, 싱가포르국립대학 및 미국 컬럼비아대학 박사후연구원,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연구교수, 한양대학교 비교역사문화연구소 HK교수 등을 거쳐 현재 전북대학교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에서 연구와 교육에 주력하고 있다. 과학기술을 빼놓고 근현대 한국사를 바라본다면 그 온전한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는 신념 아래, 학위논문들에서 다룬 주제에 더해 한글타자기, 기능올림픽, 식품영양학 등 다양한 주제들을 발굴하여 그 역사를 논문으로 정리하고 있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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