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월 작고한 박세일 교수는 ‘온정적 보수주의자’ ‘보수의 아이콘’ ‘신보수주의자의 지적 상징’으로 불렸다. “보수는 철학이 없고, 진보는 정책이 없다”고 양쪽을 다 비판했지만 박 교수는 두 진영 모두에서 영입하고 싶어 했던 인재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박세일 당시 정책수석이 뭐라고 하면 “당신은 애국자니까”라고 하면서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삼고초려했지만 거절당했다. 1주기를 맞아 얼마 전 나온 추모집 ‘내가 만난 위공 박세일’에서 지인들이 전한 내용이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속담이 있지만 자신과 생각이 다르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을 곁에 두기 쉽지 않은 게 인지상정이다. 노론과 소론의 인물을 고르게 관료로 등용한 영조나 출신을 가리지 않고 채제공 같은 남인을 영의정에 임명하고 서얼 출신들도 적극적으로 등용한 정조의 탕평정치가 추앙받는 이유다.
문재인 대통령은 “정조대왕처럼 탕평정치를 하겠다”고 했다. “능력과 적재적소를 인사의 대원칙으로 삼겠다” “무자격·부적격자의 낙하산·보은 인사가 없도록 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그 다짐은 허언이 된 지 오래다. 요즘 공공기관에는 낙하산 부대의 공습이 한창이다. 국민연금공단, 국민건강보험공단, 코레일, 도로공사, 마사회, 국립중앙의료원, 한국국제협력단, 인천항만공사 등 타깃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대선을 도운 전직 아나운서가 IPTV방송협회장을 꿰차는 등 깨알같이 논공행상 잔치가 벌어지고 있다.
캠코더(캠프·코드·더불어민주당) 인사는 지난해에도 있었지만 올해 들어서는 더 노골적이다. 수법도 이전 정부들과 다를 게 없다. 말로 해서 순순히 물러나지 않으면 검찰 수사로 압박한다. 심지어 가스안전공사 등 채용비리로 물러난 기관장 자리에 다시 정치인 출신을 내려보내고 있으니 이건 채용비리가 아니고 뭔가.
공공기관 채용비리도 낙하산 기관장이 아니라면 덜했을 거다. 연줄로 자리를 꿰찬 인사들은 정치권 입김을 차단하는 데 역부족이다. 2012∼2013년 518명 입사자 거의 전원이 청탁으로 입사했다는 의혹을 받는 강원랜드 사례가 이를 방증한다. 피라미 낙하산을 없애겠다면서 위로 대어 낙하산을 내리꽂는 것은 모순이다. 현 정부가 모토로 내세우는 공정사회에도 반한다.
낙하산 인사를 조심스러워하던 분위기는 오히려 당당해졌다. “국정철학을 공유하는 분”에서 “정치인은 가장 경쟁력 있는 분들”로 둔갑했다.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은 지난주 공공기관 낙하산 인사를 하고 있다는 야당 의원 지적에 “정치인은 낙하산이라는 것 동의하지 않는다”며 “막상 인사 해보면 상당 영역에 가장 경쟁력 있는 그룹이 정치인들이다. 정치인을 서로 낙하산이라고 공격하는 문화가 개선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기업은 이류, 행정은 삼류, 정치는 사류’라는 20년 전 재벌 회장 말이나 일 안 하는 국회의원들에게 최저시급만 주자는 국민청원이 빗발치는 것을 몰라서 하는 말인지 궁금하다.
백번 양보해 정부가 지분을 갖고 있는 공공기관은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민간 기업과 민간 금융사, 민간단체 인사까지 개입하는 것은 과하다. 이전 정부가 그렇게 했어도 ‘적폐 청산’을 외치는 문재인정부는 이런 적폐는 따라하면 안 된다. KT나 포스코 등은 외풍을 차단하기 위해 참여정부 시절 인사들을 사외이사로 영입하고 있다. 10년간 초야에 묻혀 있던 이들이 이래저래 살맛났다고 하니 웃픈 현실이다. 민영화된 지 20년이 다 돼 가는데도 정권마다 되풀이되는 KT와 포스코 CEO 교체의 흑역사는 이제 그만 봤으면 좋겠다.
민간 경제단체인 무역협회장에 이어 경총 회장과 상근부회장도 코드에 맞는 인사로 갈아치우고 있다. 이래서야 누가 정부에 ‘쓴소리’ 한 번 할 수 있겠는가. 방관과 침묵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자명하다.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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