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18.03.14. 03:02
문재인, 대화 기회 마련했지만 악마는 늘 디테일에 있어
대화하고도 성과 없으면 대화에 대한 기대 남지 않아 진짜 위기가 찾아온다
그런 전략이 북한 김정은에게 통해 대화에 나선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한미 군사훈련은 해도 좋다고 통 크게 말한 김정은이다. 그를 대화에 나서게 한 건 경제제재라는 분석이 꽤 설득력 있다. 트럼프의 위협이 잘 통한 건 오히려 문재인 정부다. 정부는 일본이나 미국 하와이가 하는 전쟁 대비 훈련은 한 번도 하지 않으면서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까 노심초사하는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트럼프는 싸움꾼처럼 보이지만 경제적 이익에 관해서는 지독해서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실제 전쟁은 누구보다 꺼린다. 그의 책 ‘협상의 기술’을 읽어보면 거칠게 말하는 것은 실은 진짜 싸움을 피하려는 의도가 있어서다. 트럼프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무력행사는 북한의 ‘코피’를 터뜨리는 정도다. 그거라도 할 수 있을지 논란이 있었다. 문 대통령이 트럼프식 무력시위의 이중성을 보지 못하고 전쟁의 전(前) 단계로만 보려 했다면 성급했다고 할 수 있다.
부동산 개발사업에서는 잘 통했으나 안보에서도 통하는지 불안했던 트럼프식 협상 기술의 효용성을 입증하고 싶어 하던 그에게 북한과의 회담은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었다. 한국 특사단이 ‘트럼프님께서 주도한 압박이 주효해 어쩌고저쩌고’ 하니 트럼프는 그 자리에서 5월까지 김정은을 만나겠다고 답했다. 그 자리에서 말했다고 즉흥적으로 결정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미국 정상이 북한 지도자를 만나주는 것 자체가 미국이 오랫동안 아껴온 카드인데 함부로 썼다는 느낌이 든다.
트럼프는 북-미 정상회담을 백악관이 발표하지 않고 한국 특사단이 미국 기자들 앞에서 직접 영어로 발표하도록 했다. 북-미 정상회담은 한국이 주선했으므로 그 성공도 한국이 책임지라는 뜻이다. 북-미 정상회담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1월 북한의 평창 겨울올림픽 참가 유도에서부터 무려 5개월의 시간을 핵 프로그램 완성을 목전에 둔 북한에 벌어준 책임이 오롯이 문 대통령에게 돌아간다. 나쁜 결과는 남 탓으로 돌릴 준비도 미리 해두는 것이 그의 몸에 밴 협상 기술인 듯하다.
프레임은 늘 흠잡을 데 없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문 대통령이 4월 남북 정상회담에서 북한으로부터 받아내려 할 긴박한 양보는 미국 본토에 도달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개발 보류다. 그 대신 북한은 ‘핵 동결=입구, 핵 폐기=출구’로 내걸고 미국과 평화협상을 벌이려 할 것이다. ICBM은 보류한다고 하더라도 핵 폐기를 조건으로 미국과 평화를 맺으면 김일성 일가가 3대에 걸쳐 추구해온 핵 보유의 목적은 달성된다.
핵과 평화의 맞교환은 논리적으로는 간단해 보인다. 그러나 미국이 원하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핵 폐기(CVID)’에는 난제가 수두룩하다. 북한이 원하는 체제 안전 보장의 범위도 명확하지 않아 미군 철수 등 심각한 갈등을 초래할 수 있는 요구가 잠재해 있다. 문 대통령은 민족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진 듯한 비장한 자세로 운전대를 잡았으나 악마들을 다룰 남다른 치트키(cheat key·게임에서 비장의 무기)를 갖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대화 말고는 무슨 대안이 있는가.’ 문 대통령은 영수회담에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에게 그렇게 물었다. 핵을 갖고도 무너진 옛 소련의 사례는 오히려 다른 대안을 제시한다. 제재와 압박으로 북한을 핵만 가진 빈털터리로 만드는 것이다. 핵은 절대무기이지만 함부로 쓸 수 없다는 한계도 있다. 설혹 대안이 없다고 하더라도 있는 척해야 할 판에 ‘대화 말고는 무슨 대안이 있느냐’는 발언은 스스로의 협상력을 깎아 먹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대화로 문제가 해결된다면 그보다 좋은 게 없다. 다만 대화는 시기가 중요하다. 정말 절묘한 시기를 택한 것인지 지켜보자. 대화를 하고도 가시적 성과가 나오지 않아 대화에 대한 기대가 더 이상 남지 않는 순간 진짜 위기는 시작된다. 그때 대화의 결과는 제쳐두고 대화의 성사만을 위해 무작정 달려온 사람은 칭송을 고스란히 비난으로 돌려받는다. 위기는 기회가 되고 기회는 위기가 되기도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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