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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치! 코리아] 모든 '미투'는 정의로운가?/ [기자의 시각] '펜스 룰'은 답이 아니다

바람아님 2018. 3. 17. 16:49


[터치! 코리아] 모든 '미투'는 정의로운가?


(조선일보 2018.03.17 박은주 디지털편집국 사회부장)


짓밟힌 자의 몸부림 '미투'
그 근본은 '法外 투쟁' 성격, 순수성 잃은 '미투'도 때때로
남성들 '남녀칠세부동석' 전략… 미투의 '레벨업' 전략 필요


박은주 디지털편집국 사회부장박은주 디지털편집국 사회부장


미국 뉴욕타임스지(紙)가 "영화계 거물 하비 와인스틴이 지위를 이용해 여배우와 업계 종사자를

성폭행해 왔다"고 보도한 게 작년 10월 5일이었다. 이후 며칠 사이 지구상의 거물들이 줄줄이 사라졌다.

'하비 효과'라는 말도 나왔다.

지난 1월 29일 서지현 검사의 '실명 폭로'로 우리 사회에도 '성폭력 고발' 둑이 터졌다.


실상은 너절하고 추악했다. 진보라더니, 교수라더니, 배고픈 예술가라더니, 성직자라더니, 알량한 권력으로

여성을 유린해 왔다. 짐작은 했지만 차마 들추지 못했던 일들이 하루에도 몇 건씩 드러났다.

가해자로 지목된 배우가 자살했다. 안타깝다. 하지만 '미투'를 멈출 명분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곧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할 시점이 올 것이다. 모든 '미투'는 정말 정의로운가.


'미투'는 사회적 약자가 선택한 자해적 응징법이다. 적장을 안고 뛰어내린 '논개'의 전법(戰法)을 닮았다.

논개 손에 죽은 적장의 나라에도 '가미카제' 전법이 있다. 미투는 '사법'체계에 대한 불신, 배척을 전제로 한다.

'혐의-수사-기소'의 수순 대신 상대를 바로 여론재판으로 '명예 사형'시킨다. 사적 보복, '린치' 성향도 있다.

그럼에도 세상이 '미투'를 지지하는 건, 그 피해가 너무 넓고 깊기 때문이다.

적을 베려 제 심장까지 찌르는 그 마음을 세상이 알아주는 것이다.


지금은 '미투 해일(海溢)' 수준이다. 해일은 가려서 덮치지 않는다. 사람과 동물, 빵과 쓰레기를 한 번에 다 쓸어버린다.

'프랑스 혁명' 때 단두대에서 정식 처형된 사람은 4만~5만명이지만, 사적 처형으로 100만명이 넘게 죽었다는 추정도 있다.


'거의 혁명적' 상황에 이런 '부수적 피해'는 어쩔 수 없다고 눈감아야 하는 건가?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시키는 70년대식 개발 논리와 다를 바 없다.

"여자는 수백 년을 당했는데 고작 두어 달 갖고 무슨 난리냐"며 모른 척해야 할까?

'동시대 남성'에게 과거의 감정까지 '대속(代贖)'시키는 건 온당치 않다.


'남성'이 하나의 가치관으로 살지 않듯, '여성'도 그렇다. 그래서 '미투'를 오염시키는 여성도 나온다.

'익명의 피해자 A씨'를 다룬 기사를 읽다 보면, 최소한의 팩트 체크를 했나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두 사람 사이에 'A B C D E'의 사건이 있었는데, 'A B'만 언론에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양아치와 강간범은 분명히 다르다.

이성적으로 보자는 얘기가 그래서 나온다.

보수 남성들이 가해자였다면 길길이 날뛰었을 진보 인사들이 진영 보호를 위해 '논리적 미투'를 말하는 건 역겹지만,

타당한 구석도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비대칭성'은 생각해 볼 문제다. 익명의 피해자가 '호명'하는 순간 그는 바로 매장된다.

'익명이라 더 무섭다'는 얘기가 나온다. '힘의 대칭'이 필요한 건 맞다.

미국 '미투'는 거의 대부분 실명이다. 그걸로 신뢰도가 높아진다.

'익명'이 필요한 이들도 있다. 위계질서가 명확한 조직의 종사자나 학생들에게 실명을 권할 순 없다.

피해자가 익명이면 가해자도 익명으로 처리되는 게 공평하다.

'익명'을 '무책임'의 방패로 쓰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를 잃으면 미투는 곧 반격당한다.


"남자의 자구책은 '펜스룰(일터에서 여성과 거리 두기)'뿐"이라는 목소리도 그중의 하나다.

'미투 운동'이 '남녀칠세부동석'을 부활시키는 이 아이러니.


성폭력은 남녀 문제가 아니라 '권력' 문제다.

직원이 '회장님 사모님'을 성추행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 있나. 무조건 '남자 대 여자' 문제는 아니다.

남자들을 동지로 끌어들이는 미투였으면 좋겠다.  



[기자의 시각] '펜스 룰'은 답이 아니다

      

(조선일보 2018.03.12 유소연 사회정책부 기자)


유소연 사회정책부 기자유소연 사회정책부 기자


몇 년 전 출입처와 기자단 회식 자리에서 한 검사가 여자 기자 몇 명을 끌어안으려 하는 추태를 부렸다.

항의가 들어오자 다음 날 그는 일일이 전화를 돌려 사죄했다.

지난 7일 그가 검사직을 그만두고 변호사 개업을 한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혹시 제 발 저려서?"라는 생각이 스쳤다.


최근 한 문화예술계 인사가 내놓으려던 작품 발표를 보류하기로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요즘 같은 때 혹시 모르니 몸 사려야 한다"는 이유에서라고 했다.

그의 가까운 동료 몇 명은 최근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며칠 전 한 남자 교수에게 취재 자문을 하려고 연락했더니 "미투 때문에 부담스럽다"며 응하지 않았다.


성폭력 폭로가 잇따르는 가운데 일부 남성은 '미투' 눈치 보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간 여성 인권에 얼마나 무심했는지 자성(自省)하기보다 "나도 운(運) 나쁘면 걸릴지 모른다"는

억울함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이 느끼는 불안감의 강도는 그동안 누려온 '젠더(gender·性) 권력'의 크기에 비례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잃을 게 많은 이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빌미를 주지 않겠다는 명분으로 회식, 출장 등에서 여자 직원들을 배제하는 현상이 번지고 있다. 이른바 '펜스 룰'이다.

여자 직원을 성적 대상이 아닌 '동료'로서 대하는 태도를 그동안 알지 못했고 알려 하지도 않았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여성을 일터에서 배제해 남성중심적 사회 구조를 더 공고하게 만드는, 시대착오적 대응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펜스 룰'에 대한 일부 직장 남성들의 반응은 마치 해답을 찾은 듯 의기양양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무고한 남자들의 생존법'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이들은 직장에서 '남녀칠세부동석' 하면 손해 보는 쪽이 누군지 정확히 알고 있다.

'펜스 룰'을 외칠수록 일터에서 권력이 남성에게 쏠려있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뿐이다.

우리나라 여성 임원 비율은 2.7%(매출 상위 500대 기업 기준).

'펜스 룰'은 직장 내 인사권자 대다수가 여성이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해법이다.


이런 우리 사회의 민낯을 직시해야 한다.

성범죄 가해자에 대한 단죄 외에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숙제는 여럿이다.

먼저 우리 사회의 척박한 '젠더 감수성'을 개선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 문제에서 내가 방관자가 되지는 않았는지, 나도 모르게 2차 가해를 한 적은 없었는지,

성차별적 구조에서 누린 특혜는 무엇이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노래방 금지' '회식 금지' 같은 일과성 처방에만 빠져있는 건 우리 사회가 성숙해질 기회를 저버리는 것이다.
      




블로그내 같이 읽을 거리 :

[윤희영의 News English] '펜스 룰(Pence rule)'과 'fence ru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