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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멱칼럼]하루를 살아도 행복한 삶

바람아님 2018. 4. 17. 08:55

이데일리 2018.04.16. 05:00

 

물질적 욕망만 추구하다 착한 유전자 잃은 한국인
영화 '소공녀' 주인공 같은 주체적·자립적 삶 고민해야

 

 자주(自主)란 스스로 주인이 된다는 말이다. 최근 한국영화 ‘소공녀’는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주의 길을 가는 여성의 삶을 그리고 있다. 여성이 주인공이긴 하지만 반드시 여성 고유의 문제만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 보편의 이야기다.

영화는 주인공 미소가 한국사회에서 왜 살아가기 어려운가를 설명한다. 그녀는 대학을 중퇴하고 직업전선에 나섰으나 가사도우미로 살아가는 것 외에 별다른 벌이가 없다. 그녀의 안식처는 세 가지다. 남자 애인과 사귀는 것, 담배 피우는 것, 바에서 느긋하게 고급 위스키 한 잔을 즐기는 것. 이 세 가지를 위해 돈을 벌지만 수입은 항상 부족해 있던 월세방마저 빼게 된다.

그녀는 대학 때 활동했던 음악 밴드의 멤버들에게 신세를 지기 위해 하나씩 그들을 방문한다. 그녀가 그들에게 의존하기로 했던 것은 영원히 신세를 지기로 한 게 아니라 어려울 때 잠시나마 도와줄 의리나 우정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걸 미소는 인정이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하나같이 그들은 여유가 없었다. 그들 모두는 제 코가 석 자였던 것이다. 신세를 지긴커녕 그들의 빠진 코 석 자를 오히려 위로해주는 천사 역할을 할 뿐이었다. 심한 경우 염치없는 것이란 말까지 들어야 했다. 밴드에서 기타를 쳤던 언니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그녀는 네 명의 친구 중 가장 잘 사는 부잣집 아내였다. 그녀는 완벽하게 신분세탁에 성공했다. 남편은 그녀가 대학 때 밴드에서 기타를 치며 열정적인 시간을 보냈다는 것조차 모른다. 요조숙녀로서 신분이 위장돼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과거를 알게 하는 미소의 존재는 불편하고 불안한 대상이었다. 미소에게 수표 한 장을 던져 주고 쫓아내면서 염치없는 여자라고 몰아붙인다. 미소는 돈도 뿌리치고 그곳을 떠난다. 염치없다는 이유가 돈도 없는 주제에 담배를 피우고 고급 위스키를 즐기며 남의 집을 뻔뻔하게 전전한다는 것이다.


미소는 술, 담배를 즐기는 기호가 돈과 직결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남의 집에 얹혀사는 것도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대상과의 친교 정도라고 생각한다.

더는 자신을 받아줄 사람이 없고 믿었던 애인마저 돈을 벌기 위해 외국으로 떠나자 미소는 한강 둔치에 텐트를 치고 사는 마지막 선택을 한다. 홈리스(노숙인)가 된 것이다. 홈리스는 유목민의 후손인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가장 인간다운 삶의 형태일지 모른다. 어딘가에 정착하고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분명히 안정된 삶의 조건이긴 하지만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란 말이 있다. 어디에 가든 그곳의 주인은 바로 나라는 불교의 가르침이다. 미소라는 이름조차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인생은 그 자체로 살아가는 게 고통일 것이지만 미소를 잃지 않는다는 그 낙천성이야말로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이 가장 닮아야 할 덕목이 아닐까 싶다.


원작의 소공녀와는 아무 관련이 없지만 고생 끝에 낙이 오는 소공녀의 이야기는 이 영화에서 고생만 하다 끝나는 이야기로 변형됐다. 집도 없이 가난한 그녀의 모습에 관객들은 불행한 결말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는 미소의 인생을 불행하다고만 할 수 있을까? 감독은 자주적인 인간이 하루를 살아도 행복한 것이며 노예처럼 비굴하고 굴종의 삶을 사는 사람은 고대광실에서 산다 해도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관점을 제공한다. 그녀가 유람했던 친구들은 집도 있고 가정도 있지만 하나같이 불행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끝없이 물질의 욕망 속에서 무엇을 추구하는지도 모른 채 살아간다. 한국인이 잃어버린 것은 물질이 아니었다. 8000년 역사 속 높은 자부심과 남을 도와주며 살아왔던 착한 유전자를 잃어버린 것이다. 가난해도 적은 돈으로나마 원하는 삶의 여유를 찾는 지조 있는 여성의 모습을 통해 현대 한국인이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야 할지 진지하게 질문하고 있다.


최은영 (euno@e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