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서소문 포럼] 개헌안에 숨겨진 시장경제를 겨눈 칼날

바람아님 2018. 5. 1. 08:48

중앙일보 2018.04.30. 01:30

 

산업현장의 정치 기지화 위험은 없나 꼼꼼히 따져야
노동정책에 적개심 걷어내야 근본적 구조 개혁 가능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논설위원
“내가 분노하겠더라.” 노무현 정부 당시 청와대에서 일했던 모 인사의 말이다. 23일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이 노사정 포럼 간담회에서 한 발언에 대해서다. 김 장관은 권오현 삼성전자 회장의 연봉과 관련, “분노했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실적에 따라 정해지는 최고경영자의 성과에 대해, 기업 내 경영 사안에 왜 적개심을 드러내는가. 정책 중립을 지켜야 할 국무위원이 할 소리는 아니다”고 말했다.


이런 분노가 이 정부에선 통하는 모양이다. 예전 같으면 부적절한 처신이라며 책임을 물었을 텐데, 그런 소식은 없다. 그동안 노출된 경영계의 전횡에 대한 반작용에서 나온 발언일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적개심은 지나치지 않은가.

한데 이런 적개심의 칼날이 시장 전체로 향할 것 같아 불안하다. 헌법 개정안을 뜯어보면 그렇다. 경제 질서를 보는 현 정부의 시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청와대는 ‘근로’라는 용어는 일제와 군사독재 시절 사용자 관점에서 만든 것이라고 했다. 계급 착취의 개념이라는 의미로 들린다. 그래서 ‘노동’으로 바꿔야 한단다. 조선왕조실록을 뒤졌다. ‘근로’라는 단어가 615회 나온다. ‘노동’도 354회 기록돼 있다. 북한의 조선노동당은 계급을 기반으로 한 정당 이름 아니던가. 김정일은 왜 “노동자 대신 근로자라는 명칭을 써야 한다”(2006년 5월 1일)고 했을까. 이쯤 되면 계급의 관점을 설파한 청와대의 논리가 헛갈린다. 아예 특정 용어를 못 쓰게 하는 게 헌법 정신인지 혼란스럽다.


개헌안은 기존 ‘국가는 사회적·경제적 방법으로 근로자의 고용의 증진과…노력하여야 하며’를 ‘국가는 고용의 안정과 증진을 위한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로 바꿨다. 노동계가 요구한 ‘해고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를 새긴 셈이다. 일단 고용하면 정규직으로 고용하고, 그 뒤엔 해고하지 말라는 얘기인가. 경기변동이 없는 나라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전 세계가 기업의 해고비용은 줄이고, 사회안전망을 강화해 생활안정을 꾀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기업 경영의 영역과 국가가 책임져야 할 영역을 혼동한 듯하다.

동일노동 동일임금도 헌법에 넣을 태세다. 해외 어느 나라도 헌법에 이를 명시한 경우는 없다. 평등이라는 가치를 구현하는 실천분야여서다. 한국도 남녀고용평등법과 고령자고용촉진법 등 여러 법에 적시하고 있다. 심지어 국제노동기구(ILO)는 협약 100호에서 무조건적인 차별 개념 적용을 경계한다.


사실상 노조에 무한 권한을 주는 조항도 눈에 띈다. 현행 헌법은 노동3권(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해 보장한다. 개정안은 이를 ‘자주적인 단결권과 단체교섭권 보장’ ‘노동조건의 개선과 그 권익의 보호를 위해 단체행동권을 지닌다’로 나눴다. 언뜻 보기엔 별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함정이 도사린다. 노조는 목적상 제한 없는 완전한 자유권을 누린다는 점이다. 경영, 인사. 정치 쟁점, 법률 개정 등 모든 영역을 두고 파업할 수 있다. 나아가 정치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노조 설립도 가능하다. 기업은 회사와 아무 관계 없는 일로 졸지에 공장이 멈춰도 구제받을 길이 없다. 사장이 마음에 안 들면 그를 내쫓기 위한 파업도 가능하다. 이 정도면 노조의 완벽한 경영권 확보요, 산업현장의 정치 전진 기지화라 할 만하지 않은가.


꼭 20년 전인 1998년으로 돌아가 보자. 외환위기를 극복하려 노사정이 손을 잡았다. 당시 노사정 합의문의 한 구절. ‘우리 경제를 보다 투명하고 개방적이며 경쟁촉진적인 체질로 바꾸는 근본적인 구조개혁이 없이는 지금의 국가위기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지금 노동정책에 투명, 개방, 경쟁촉진이 있는가. 글로벌 시장에서 이길 근본적인 구조개혁은 보이는가. ‘분노’로 개혁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