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비즈 2018.06.05. 04:01
고대 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코스는 “여우는 사소한 것을 많이 알지만 고슴도치는 중요한 것 한 가지를 안다”고 했다. 영국 정치사상가인 이사야 벌린은 이 말에 착안해 인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작가와 사상가들을 고슴도치와 여우의 두 유형으로 분류했다.
고슴도치 유형은 한 가지 결정론적 사고나 대원칙, 거대 이론을 통해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다. 플라톤, 단테, 헤겔, 도스토옙스키, 니체 등이 여기에 속한다. 여우 유형은 하나의 이론에 빠져들지 않고 다양한 경험의 창을 통해 세상을 본다. 헤로도토스, 아리스토텔레스, 셰익스피어, 괴테, 푸시킨 등을 예로 들었다.
이후 많은 이론가, 전문가들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의 하나로 여우와 고슴도치 비유를 들었다. 여우 스타일과 고슴도치 스타일 중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논자(論者)에 따라 평가가 엇갈린다.
경영이론가인 짐 콜린스는 고슴도치의 손을 들어줬다. 영리한 동물인 여우는 매일 고슴도치를 공략할 전략과 전술을 짜내지만 몸을 둥글게 말아서 방어할 뿐인 고슴도치를 당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콜린스는 고슴도치처럼 자신만의 장점을 단순화하고, 모든 자원을 여기에 집중하는 기업이 위대한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다고 했다.
미국 심리학자인 필립 테틀록은 여우가 더 올바른 판단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여우는 가능한 한 많은 곳에서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상황 변화에 맞춰 자신의 견해를 수정한다. 반면 고슴도치는 모든 문제를 자신이 선호하는 인과관계의 틀에 억지로 끼워맞추고, 설명되지 않는 부분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테틀록의 연구에 따르면 자신의 견해와 다른 증거가 나왔을 때 증거에 맞춰 견해를 바꾼 비율이 여우는 59%에 이른 반면 고슴도치는 19%에 그쳤다고 한다. 여우와 고슴도치는 실용주의와 이상주의, 유연성과 경직성의 대비를 보여준다.
문재인 정부는 고슴도치 스타일에 가깝다. 정권 차원의 원칙과 목표에 대한 집착이 매우 강하다.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끝장을 보려고 한다. 반론과 이견을 무시하거나 억누른다. 시대에 뒤진 낡은 이데올로기와 검증되지 않은 허술한 이론을 고집하며 현실의 제약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고슴도치 유형의 장점보다 단점이 더 두드러진다.
최저임금 인상 효과를 둘러싼 논란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소득주도성장과 최저임금 인상) 정책의 긍정적 효과가 90%”라고 했다. 통계청의 1분기 가계소득 통계에서 하위 20% 가구의 소득이 감소하는 등 소득불균형이 확대되고 정부 정책의 부작용이 드러나고 있는 데 대한 해명이다.
통계청의 공식 자료에는 대통령의 말을 뒷받침할 근거가 없다. 그로 인해 논란이 더 커지자 청와대가 국책연구기관의 별도 분석결과를 공개했다. 가구가 아닌 근로자 개인을 기준으로 보면 10개 분위 모두 근로소득이 작년보다 늘었다는 것이다. 하위 10%를 뺀 나머지 90%는 근로소득 증가율이 작년보다 더 높았다며, 이를 최저임금 인상의 긍정적 효과로 해석했다.
억지와 궤변, 견강부회(牽強附會)가 아닐 수 없다. 청와대의 새 자료는 최저임금 인상으로 직·간접 타격을 받은 자영업자와 실업자 등을 쏙 빼고 그 효과를 분석한 것이다. 시장에 불이 났는데 정작 화재로 소실된 가게들은 빼놓고 멀쩡한 가게들만 대충 살펴보고는 피해가 거의 없다고 발표한 것과 비슷하다. 피해 당사자들로서는 기가 막힐 일이다.
통계청의 가계소득 자료를 보면 2010년과 2012~14년 1분기에 근로자 가구의 최하위 10%에서 최상위 10%까지 10개 분위 모두 근로소득이 전년보다 늘어났다. 더욱이 저소득층의 소득증가율이 전반적으로 고소득층보다 더 높았다. 대표적인 소득분배지표인 지니계수는 2009년 0.314에서 2015년 0.295로 꾸준히 하락했다.
2010~14년의 최저임금 인상률은 2.75~7.2%였다. 올해 인상률 16.4%의 절반도 안된다. 그런데도 저소득층의 근로소득이 크게 늘어나고 소득불균형이 개선됐다. 정부가 최저임금을 끌어올리기 위해 안달복달하지 않았지만 지금보다 더 바람직한 결과가 나왔다. 청와대의 소득주도성장론자들이 이를 어떻게 해석할지 궁금하다.
고슴도치 유형은 이른바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에 빠지기 쉽다. 자기 논리에 사로 잡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지금 정부가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현실을 억지로 비틀고 뒤집으며 자기 주장을 고집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억지와 왜곡으로 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최저임금 인상의 긍정적 효과를 아무리 강변해도 저소득층의 소득이 줄어든 사실은 그대로다. “국내 경제가 좋아지고 있다”고 골백번 우겨도 둔화·하강 국면의 경제지표가 달라지지도 않는다. 정부는 현실을 도외시한 큰 그림과 거대 담론의 허상·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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