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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의창] 예멘 난민과 하멜의 표류

바람아님 2018. 7. 7. 08:27

세계일보 2018.07.06. 20:49

 

하멜 일행 처리 조정 골칫거리/ 13년 만에 탈출 '표류기' 편찬

최근 지난 5월까지 제주도에 들어온 예멘 난민 문제로, 제주는 물론 정부에서도 이들에 대한 처리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제주도 이외의 지역으로 가는 것을 제한하면서 제주도 주민 사이에는 범죄와 테러, 일자리 잠식 등의 우려가 일고 있다. 또 다른 편에서는 내전을 피해 제주까지 오게 된 이들 난민을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일자리를 주어 정착에 도움을 줘야 한다는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지금부터 365년 전 조선 정부도 비슷한 고민에 빠졌다.


1653년 8월 하멜 일행 38명이 제주 대정현 용머리 해안에 도착한 것이다. 차이점이라면 예멘 난민은 그들이 원한 것이었지만, 하멜 일행은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폭풍우 때문에 표류하다 제주에 도착한 것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무역선 ‘스페르베르’에 탑승한 하멜 일행 64명은 대만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다가, 8월 16일 풍랑 때문에 제주도 산방산 근처 해안에 상륙했다. 생존자 38명은 제주의 관원들에 체포됐다.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은 몇 가지 질문을 한 뒤, 당시 왕인 효종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10월 29일에는 1627년 제주에 표류했다가 조선에 귀화한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조선 이름 박연)가 한양에서 내려와 통역을 맡았다. 벨테브레이는 “우리는 외국인을 나라 밖으로 보내지 않는다. 그대들을 보호해 주겠으며 적당한 식량과 의복을 제공해줄 테니 이 나라에서 여생을 마치라”라는 효종의 뜻을 전했고, 하멜 일행은 조선에 억류됐다. 이들이 표류해온 시점은 정확히 효종이 북벌을 추진하던 시기로, 서양인의 조선 표류는 청나라를 자극할 수 있는 사안이었기 때문에 조선 정부는 가능한 한 이들의 존재를 노출되지 않게 하려고 했다. 억류 생활이 이어지자 하멜 일행은 몇 차례 탈출 계획을 세웠고, 탈출은 그때마다 실패로 끝났다. 조정의 경비는 더욱 삼엄해졌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1654년 5월 말 제주에 머물던 이들의 한양 압송이 추진됐다. 한양 도착 후에는 2~4명씩 분산 수용됐다. 효종을 직접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답은 “외국인을 국외로 내보내는 것은 이 나라의 관습이 아니므로, 여기서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하며, 대신 너희들을 부양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왕을 만난 다음날 훈련대장의 호출을 받아 갔는데, 왕이 자신들을 친위병으로 삼았다는 말을 들었다. 친위병이 된 후 지금의 주민등록증에 해당하는 호패를 받았는데 이름, 나이, 국적, 왕을 위해 할 역할이 적혀 있었다. 1655년 3월 하멜 일행은 다시 한 번 탈출 계획을 세웠다. 청나라 사신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자 한 것이다. 일행 중 2명이 청나라 칙사가 귀국하는 길목에 매복한 후, 조선 옷 대신 네덜란드 복장을 하고 칙사에게 억류 상황을 알렸다. 보고를 받은 효종은 칙사를 매수해 이 일이 청나라에 알려지지 않게 할 것을 지시했고, 탈출을 시도한 2명은 수감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사건의 심각성을 파악한 조정에서는 하멜 일행을 한양에서 격리시켜 전라도 병영에 분산 수용하도록 했다.


1659년 효종이 사망하고 현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하멜 일행의 처리는 조정의 골칫거리였다. 1662년(현종 3) 현종은 당시까지 생존해 있던 22명을 여수에 12명, 순천에 5명, 남원에 5명씩으로 나눠 보냈다. 하멜은 여수로 보내져 훈련장에 나가 화살을 줍고, 매일 새끼를 꼬는 힘든 생활을 했지만 틈틈이 탈출 계획을 세워 나갔다. 배를 구하고, 쌀과 물, 냄비, 땔감까지 준비한 하멜 일행 13명은 1666년 9월 4일 13년간 억류됐던 조선을 탈출해 9월 8일 일본에 도착했다. 나가사키를 거쳐 1668년에는 고국인 네덜란드에 도착했다. 하멜은 조선에서의 억류 생활을 생생하게 정리한 ‘하멜표류기’를 편찬했다. 밀린 월급을 청구하기 위한 증거자료로 제출하기 위해 책을 쓴 것도 흥미롭다.


365년의 시차를 두고, 제주는 낯선 이방인의 체류 문제로 또다시 뜨거운 지역이 됐다. 다양한 입장 탓에 예멘 난민의 처리 문제는 심사숙고해서 그 해결 방안을 제시해야 하겠지만, 예멘 난민의 존재로 인해 대한민국과 예멘은 역사적 인연을 만들어 가고 있다. 하멜 일행의 표류로 조선과 네덜란드가 역사적 인연을 만들어간 것처럼.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