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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인문학] 오만과 징벌

바람아님 2018. 8. 5. 09:00
디지털타임스 2018.08.01. 18:08

      

김 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나는 인간의 행복이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의 말이다. 세상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고,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과 자료를 검토한 그의 결론이다. 그 근거는 이렇다. "예전에 강성했던 수많은 도시들이 지금은 미약해졌고, 나의 시대에 강성한 도시들이 예전에는 미약했다." 인간의 역사에서 수없이 목격되는 흥망성쇠의 변곡선. 거기에도 법칙 같은 것이 있다. '성공에 도취되어 어깨에 과도한 힘이 들어갈 때, 파멸하기 십상이다.' 그 오만함을 그리스 말로 '휘브리스'(hybris)라 했고, 그 파멸을 신의 응징이라 여기며 '네메시스'(nemesis)라 일렀다.


가장 대표적인 일화로 리디아 왕국의 크로이소스를 꼽을 수 있다. 아테네의 지혜로운 정치인 솔론은 아테네를 개혁할 혁신적인 법안을 제정한 후에 세상 구경을 한다며 아테네를 떠났다. 이곳저곳 떠돌다가 리디아 왕국의 사르디에스에 들렀고 크로이소스왕을 만났다. 그는 한창 잘 나가던 당대의 국제적인 실력자였다. 왕은 이방의 현자에게 자신의 영화를 뽐내고 싶어 어마어마한 보고(寶庫)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물었다. "나는 당신이 지혜를 사랑하며 세상 구경을 많이 다녔다는 말을 들었소. 그래서 묻겠소. 당신이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유복한 자는 누군 것 같소?" 왕은 솔론이 당연히 자신을 지목하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솔론의 대답은 그의 기대에 어긋났다. "아테네 사람 텔로스를 꼽을 수 있습니다." 당황하고 기분이 상한 그는 잠시 후, 그러면 두 번째로 유복한 자는 누구냐고 물었다. 으뜸은 아니어도 버금은 되겠지, 왕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솔론은 눈치 없이 또 다시 왕의 기대를 저버리는 대답을 했다. 아르고스의 클레오비스와 비톤이란다.


크로이소스는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고 크게 화를 냈다. 자신의 거대한 제국의 위용과 보고의 풍요로움을 보고도 자신을 지목하지 않았다는 것, 게다가 그가 자신들보다 행복하다고 지목한 자들이 대단한 권력자도 아닌 평범한 시민들이었다는 것 때문이다. "이보게, 그대는 우리의 행복이 보잘 것 없어 보이는가? 우리가 그런 일반 평민들보다도 못하다고 여기는가?" 그러자 솔론이 대답했다. "크로이소스 전하, 저는 신(神)이 정말로 시기심 많고 혼란스런 존재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저에게 인간들의 일에 대해 물으셨는데, 인간은 오랜 세월을 살며 자신이 원치 않는 많은 일들을 보고 겪게 됩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우연에 지배를 받는 존재입니다. 지금 제가 보기에 전하께서는 대단히 부유하시고 많은 사람들을 다스리는 왕이십니다. 하지만 저는 전하께서 아름답게 생을 마감하셨다는 말을 듣기 전에는 전하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잘나가고 대단해 보여도 한방에 훅 갈 수 있다는 것, 당신이 어떻게 죽는지 보고서야 비로소 행복한 사람인지 아닌지 말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랬다. 크로이소스는 현재의 번영에 취하지 말고 결말을 잘 살피라고 했던 솔론을 어리석다고 여겼으며 자신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라고 자신만만했다. 얼마 후 그는 델피 신전에서 아폴론의 신탁을 들었다.


그가 페르시아인들과 전쟁을 한다면 거대한 제국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크게 기뻐했고 페르시아의 키로스 왕국을 정복하게 되리라고 확신했으며, 국력을 총집결시켜 군사적 원정을 감행했다. 모든 것을 집어 삼킬 것만 같은 기세로 돌격했지만, 그것은 신의 네메시스를 부르는 휘브리스였다. 그는 패했고, 그의 번영을 상징하던 사르디에스는 페르시아인들에게 정복당했고, 그는 포로 신세가 되었다.


신탁이 틀린 것이었을까? 아니었다. 크로이소스가 덜 오만했고 더 슬기로웠다면, 그는 신탁의 진의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신중하게 되물었을 것이다. '신이시여, 내가 전쟁을 통해 멸망시킬 것이라 하신 그 거대한 제국이 페르시아의 키로스 왕국입니까, 아니면 나의 왕국 리디아입니까?' 애초부터 신탁은 그가 전쟁을 일으킨다면 '거대한 왕국', 즉 그 자신의 리디아 왕국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경고였던 것이다. 그가 신탁의 진의를 미리 알았다면 전쟁을 피하고 자신의 영광을 지속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파멸은 지혜로운 솔론의 조언을 무시한 오만의 결과였다. 잘 나간다고 으스대지 말고 겸손하고 신중할 것, 예나 지금이나 가슴에 새겨둘 만한 교훈임에 분명하다.


김 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