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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근의 동양철학 톺아보기] 묵자(墨子) (6) 대장부와 좀생원이 다른 이유

바람아님 2018. 8. 2. 18:01

(매경이코노미  2015년 02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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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데리고 여름철 바닷가에 놀러 가면 빼놓지 않고 하는 놀이가 있다. 모래성을 쌓는 놀이다.

모래성을 쌓아놓으면 파도가 밀려와서 성을 무너뜨린다. 더 높이 쌓으면 모래성이 무너지지 않을까 싶어 자꾸자꾸

쌓아보지만 밀려오는 파도에 모래성은 여지없이 허물어진다.
 
아무리 높이 쌓으려고 해도 파도로 인해 무너지는 속도를 이겨내기가 어렵다.

그러나 아이의 시각에서 보면 쌓았다 허물어지는 것 자체가 재미인 만큼 모래성 쌓기 놀이를 계속하게 된다.

반면 사람이 하는 활동 중에는 싫어서 피하려는 것도 있다.

예컨대 사랑하는 사람과의 데이트 때는 콧노래를 부르며 약속 장소로 달려가겠지만, 심부름을 할 때는 툴툴거리며

대문을 나서는 식이다. 또 거짓말을 다들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인생을 살다보면 모든 일을 사실대로 말한다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금을 많이 거두면 소득재분배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정작 증세를 한다고 하면 반대한다.

국방의 의무를 지켜야 한다지만 막상 내가 갈 상황이 되면 입대가 힘겹게 느껴진다.

이처럼 우리는 놀이처럼 즐거운 상황은 좋아하고 의무와 규칙처럼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상황을 부담스러워한다.

여기서 우리는 놀이와 규칙에 대해 두 가지 선택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즐거움을 우선시하는 입장이다. 놀이든 규칙이든 사람을 힘들게 해서는 안 된다. (행복 중심적 사고)


둘째, 규칙의 권위를 중시하는 입장이다. 여러 사람이 살려면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할 수 없고 서로를 위해

배려해야 한다. (규칙 중심적 사고)


춘추전국시대는 종족 중심의 사회 유대가 허물어지고 약육강식의 대립이 심화되던 시대였다.

지배층은 멸망을 피하려면 국력을 키워야 했고 국가를 중앙집권화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새로운 의무와 권리를 제시했다.

묵자와 상앙은 귀족 중심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따를 수 있는 객관적이며 서로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호혜적인 규범을

제시하고, 그에 따라 신상필벌(信賞必罰)을 확실하게 실시했다.

공자는 이해관계에만 집중하면 개인과 개인의 갈등, 국가와 국가의 대립을 줄이지 못하고 더 키울 수밖에 없다고 봤다.

그는 사람들이 먼저 정의, 배려, 고상함 등 공통의 가치를 내면화시키고서 생산 활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목표와 방법을 달리하지만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좋고 싫음을 떠나 공동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요구하는 점에서

같다. 사람들은 국가 발전의 논리든 사람다움의 가치든 공동 규칙을 준수하고 존중해야 하는 새로운 책임을 떠안아야 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책임을 실행하는 만큼 개인적으로 이익을 얻고 국가 발전에도 기여하거나, 미성숙한 사람에서

성숙한 사람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시대가 사람들에게 규칙 준수를 요구하는 것이 일반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노자는 일반 규칙의 폭력성 또는 반인간성을

제기했다. 예컨대 군대에서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인사하는 예절을 떠올려보라.

하급자는 상급자를 보면 즉시 거수경례를 하고 상급자가 볼 때까지 그 자세를 유지한다. 하급자는 언제 어디서 상급자가

나타날지 몰라 긴장하게 된다. 실제로 손과 얼굴의 거리, 손의 각도, 목소리의 크기와 박력 등 군대 예절이 몸에 배려면

시간이 걸린다. 하나라도 어색하면 조교나 상급자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진다.

특히 신병교육대의 조교들은 훈련병들의 거수경례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 하나하나 세세하게 지적한다.


노자도 이런 상황을 목격하고 그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 비판했다.

예절을 ‘문명화의 징표’로 생각하는 사람은 스스로 행동 하나하나 예절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기를

요구한다. 다른 사람이 예절을 따르지 않으면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상대의 팔을 비틀어서라도 예절대로 움직이게 하려고

한다(‘노자’ 38장). 이렇게 되면 사람은 반가워서 인사하고 흥겨워서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틀에 맞춰서 인사하고 상황에 따라 연기하게 된다.


그래서 노자는 “예절은 정성과 믿음이 사라지면서 생겨나고 사람 사이가 어지러워지는 시작이다

(夫禮者, 忠信之薄, 而亂之首)”라고 비판했다. 이 말은 이해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우리는 오랜 친구 사이에는 굳이 예절을 따지지 않고도 우정을 가꾼다. 오히려 예절을 너무 따지고 격식을 차리면 사이가

어색해진다. 반면 사업이나 공식적인 관계로 만날 경우 우리는 상대가 예절을 지키지 않으면 무례하다고 화를 낸다. 하지만

예절을 깍듯하게 지키면 지킬수록 상대가 허물없는 친구처럼 진실하게 느껴지기보다는 더욱 가식적으로 느껴지기 쉽다.


129656 기사의 1번째 이미지노자는 예절과 희생을 비롯해 규칙을 중시하는 흐름이 사람을 ‘문명인’으로

만드는 길이 아니라 소박하고 수더분한 품성을 망치는 ‘반인간화’의 길이라고 봤다.

반가우면 몸을 껴안을 수도 있고 볼을 비빌 수도 있지, 꼭 고개를 얼마나 숙이고

손을 포개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자는 이를 바탕으로 한층 더 추상적인 결론을 내린다.


첫째, 소박한 도리가 사라지자 품성을 찾기 시작했고, 순수한 품성이 사라지자

사랑을 찾기 시작하고, 따뜻한 사랑이 사라지자 정의를 찾기 시작했고,

엄격한 정의가 사라지자 까다로운 예절을 찾기 시작했다

(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 失仁而後義, 失義而後禮).

따라서 예절을 들먹이게 된 것은 최후의 방편이지 최고의 가치가 아니다.


둘째, 품성(德)에도 차이가 있다.

품성이 높으면 도리어 품성이 없는 사람처럼 엉뚱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품성을 갖추고 있다(上德不德, 是以有德).

반면 품성이 낮으면 품성을 잃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하다 보니 실제로는 품성을 지키지 못한다(下德不失德, 是以不德).

소비자 민원이 생기면 말단 직원은 재량권이 없으므로 규정에 얽매이고 상황을 기계적으로 판단하게 되지만,

상급자는 폭넓은 재량권을 갖고 있으므로 상황을 융통성 있게 처리할 수 있다. 그 결과 말단 직원은 규정을 지키려고 하다

규정의 노예가 되는 반면, 상급자는 규정을 어기는 듯하지만 규정을 생기 있게 만든다.

노자는 춘추전국시대가 규정을 과도하게 강조하면서 사람들이 하나같이 좀생원처럼 꽉 막히게 됐다고 봤다.

그는 사람이 얄팍함보다는 두터움, 거품보다는 내실을 살리는 대장부(大丈夫)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얄팍하고

거품을 내뿜는 사람이 아니라 두텁고 내실이 꽉 찬 대장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노자는 두 가지 길을 제시한다.


첫째, 뛰어남과 지혜, 사랑과 정의, 교묘함과 이익처럼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가치나 나아가야 할 방향을 내걸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생기게 되면 사람들은 그쪽으로 가지 않으면서 가는 척하게 되고, 바라지 않으면서 바라는 듯 속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특정 가치를 내세우지 않으면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길을 찾아서 다른 사람의 것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된다(19장).


둘째, 따스함과 소박함 그리고 앞서려고 까불지 않는 자세의 세 가지 보물(三寶)이다(67장).

삼보는 시대가 요구하는 날카로움, 화려함 그리고 뒤처지지 않으려는 악착스러운 자세와 대비된다.

특정한 가치를 지키려면 날카로움으로 무장해 악착스러움을 드러내야 화려해질 수 있다.


 노자는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는 사람을 병기로 만들지만, 자신을 지키지 못하므로 보물이 될 수 없다고 밝혔다.

노자는 규칙을 내세우는 시대가 사람을 점점 기계로 만들고, 사람은 규칙 앞에 벌벌 떠는 좀생원으로 변해가는 현상을

쓸쓸하게 지켜봤다. 그는 사람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기계가 아니라 스스로 길을 찾는 대장부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대장부는 사회의 기준에 의해 재단된 깔끔한 재료가 아니라 수많은 가능성을 가진 통나무와 같은 인물이다.


 [신정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 / 일러스트 : 정윤정]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794호(2015.02.04~02.10일자) 기사입니다]


 





[신정근의 동양철학 톺아보기] 묵자(墨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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