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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사진에 담은 스물여섯 암자, 그리고 禪僧

바람아님 2018. 10. 8. 08:51

(조선일보 2018.10.08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사진가 김홍희 '상무주 가는 길' 20년전 그때 그 암자 다시 찾아


사진가 김홍희가 '상무주(上無住) 가는 길'(불광출판사)을 펴냈다.

20년 전 소설가 정찬주와 함께 '암자로 가는 길'을 취재할 때 들렀던 전국의 암자(庵子) 스물여섯 곳을 되밟아

새로 사진을 찍고 글도 썼다. 김홍희는 법정 스님의 '인도 기행', 현각 스님의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등에

사진을 실어 대중에도 널리 알려진 작가다.


그가 모터사이클을 타고 다니며 취재한 곳은 모두 유명 암자들이다.

법정 스님이 머물던 송광사 불일암을 비롯해 여수 향일암, 해인사 백련암과 원당암, 지리산 상무주암,

선운사 도솔암, 경주 남산 칠불암….


깎아지른 절벽 위 암자를 찍은 김홍희의 '바위 굴 속의 중앙암'.
깎아지른 절벽 위 암자를 찍은 김홍희의 '바위 굴 속의 중앙암'.  전국 암자 20여곳을

흑백사진 100여컷에 담고 글을 쓴‘상무주 가는 길’엔 전형적 앵글의 암자 사진은 찾아보기 힘들다.

/사진가 김홍희


한데 20여 년 만에 새로 찍은 흑백사진들은 낯설다.  감탄사 나오는 그림엽서 같은 풍경은 하나도 없다.

성철 스님이 머물렀던 백련암의 경우 긴 돌계단 위에 '백련암(白蓮庵)' 편액이 걸린 문이 찍힌 풍경은 없다.

대신 길도 없는 암자 뒤 바위에 올라가 얽히고설킨 나뭇가지들 사이로 겨우 보이는 백련암을 찍었다.

불일암은 시커먼 대나무 숲 저편에 작은 형체만 보일락 말락 한다.


글도 마찬가지다. 암자의 역사나 교통편, 주변 맛집 정보 같은 건 기대를 접어야 한다.

'상무주암' 편에선 카메라만 봐도 경기(驚氣) 한다는 스님이 "사진 찍어 뭐 할라꼬?"라고 묻자,

"딴 데 안 쓰고 스님께 보내드리겠다"고 둘러대고는 셔터를 눌렀던 일화를 적었다.

"셔터가 세 번 끊어졌다. 스님도 사라지고 거짓말도 사라지고 상무주암도 사라졌다."

그런데 그렇게 고생해서 찍었다는 스님 사진이 정작 책에는 없다.


'칠불암' 편에서 그는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에 대해 "앉아서 보면 화난 듯 보이고 서서 보면 웃는 듯 보인다.

왼쪽이나 오른쪽을 돌아가 서서 보면 윙크하듯 보이고 양쪽에 앉아서 보면 무표정하게 보인다"고 묘사해놓고

마애불 사진은 딱 한 장만 실었다. 캡션은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기를 천년'이라 적었다.


굳이 원하지 않는 것까지 떠먹여주는 과잉 친절, 정보 과잉 시대에 이 책의 매력은 불친절과 무뚝뚝함이다.

덕택에 암자들은 미답(未踏)의 공간처럼 느껴지고 상상의 여백은 넓어진다.

생전의 법정 스님이 봄·가을 길상사 법문 마지막에

"내 이야기는 여기서 마칠 테니, 나머지는 저 찬란한 꽃들에게 들으라"고 했던 것처럼,

김씨는 실마리는 줬으니 나머지는 독자 스스로 암자를 찾아가 직접 느껴보라고 권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