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日本消息

[유레카] 왕비는 괴로워 / 김영희

바람아님 2019. 1. 7. 09:46
한겨레 2019.01.06. 17:06

일본에선 오는 4월30일 물러나는 아키히토 일왕이 높은 지지를 누려온 이유를 말할 때 본인의 평화주의 발언이나 겸손한 성품과 함께 첫 ‘평민 출신’ 왕비 미치코의 인기가 늘 거론된다. 1958~59년 일었던 이른바 ‘미치 붐’은 일본의 대량소비사회 문을 연 계기로 불린다. 왕세자 커플의 연애 일거수일투족이 국민적 관심사가 되면서 주간지 창간이 잇따랐고, 이들의 결혼식 생중계는 티브이의 폭발적 보급을 가져왔다.


5월에 왕비가 될 마사코 왕세자비도 1993년 결혼 당시 인기로 치면 못지않았다. 외교관 아버지를 따라 오랜 외국생활을 하고 하버드대를 나와 영어·프랑스어·독일어 등에 능통한 촉망받는 외교관이었던 그는 경력·패션·외모 모든 면에서 ‘완벽한 여성’으로 비치며 특히 젊은층과 여성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평생 꿈이 외교관이었던 마사코는 애초 청혼을 거절했지만 ‘왕실외교 역할을 해달라’는 나루히토 왕세자의 말에 마음을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막상 왕실에 ‘커리어우먼’의 자리는 없었다. 기자회견 때 예비신랑보다 몇초 더 말한 것도 트집 잡혔다. ‘후계자 출산’ 중압감으로 우울증 등에 시달렸다. 2001년 딸을 낳은 마사코는 결국 ‘적응장애’를 이유로 2003년 말부터 15년 가까이 공식 행사에서 모습을 감췄다. 당시 왕세자는 “마사코의 커리어와 인격을 부정하는 듯한 움직임이 있다”고 공개발언해 파란을 일으켰다.


마사코와 친정 집안의 ‘지나친 엘리트의식’이 대중과 괴리를 가져왔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봉건적이고 남성 중심 시각을 가진 보수층과 언론들이 ‘왕실여성다움’이라는 낡은 잣대를 들이대온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외국 언론들은 그를 ‘황금 새장에 들어간 공주’라 부르며 일본 여성의 낮은 지위와 연결해 보도해왔다. 사실 역대 일왕 125명 중 8명이 여성이라면서, 1889년 도입된 여성 승계 금지가 21세기에도 지속되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왕자와 다르게 공주의 경우만 평민과 결혼하면 왕족 자격이 박탈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레이스 켈리부터 메건 마클까지, 왕족과 결혼한 여성들은 ‘동화의 주인공’이라 불린다. 하지만 동화가 늘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걸 우리는 안다. 지난달 성명에서 “앞으로 올 날을 생각하면 내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 불안하지만... 국민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데 힘을 다하고 싶다”고 솔직한 심정을 밝힌 마사코는 15만 인파가 몰린 지난 2일 일왕의 ‘마지막 신년인사’ 행사에 남편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마사코 ‘왕비’는 지난 25년의 괴로움을 극복하고 왕실에 새 기운을 불어넣을까.


김영희 논설위원 do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