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氣칼럼니스트/선우정 칼럼

[선우정 칼럼] 김돈중이 정중부 수염을 태울 때도 그렇게 새파랗지 않았다

바람아님 2019. 1. 14. 08:43
조선일보 2019.01.09 03:17

대통령이 불운한 게 풍수 탓인가
서른넷 행정관이 육참총장을 불러내는 무시무시한 권력이 불운을 불러들인다

선우정 사회부장
선우정 사회부장
율곡로를 지하로 넣고 창경궁과 종묘를 지상 길로 복원하는 공사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전문가들의 백가쟁명식 주장에 휘둘려 9년째 이리 파고 저리 파다가 내년 완공한다. 도로 확장 비용을 포함해 완공까지 854억원이 들어간다. 창경궁과 종묘 사이에는 원래 구름다리가 있었다. 이 다리로 사람들이 불편 없이 오갔다. 따라서 관람객 편의를 위한 공사도 아니다.

창경궁과 종묘가 해방 후 이렇게 분리됐다면 지금과 같은 공사는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제 때 분리됐다는 사실에 일제의 풍수단맥설(風水斷脈說)이 개입하면서 민족적 사업이 됐다. 설(說)을 사실로 홍보하는 곳이 문화재청이다. 창경궁 홈페이지 설명에 '일제가 종묘와 연결된 부분에 도로를 개설해 맥을 끊었다'고 썼다. 언론도 동조했다.

서울 율곡로의 당시 이름은 6호선이었다. 1932년 개설 당시 이 도로는 현실적으로 필요했다. 지금 대학로에 경성의 교육·의료 중심지가 조성됐다. 제국대학, 병원, 관립 전문학교가 들어섰다. 광화문 인근 행정 중심과 교육·의료 중심을 잇는 최단 동선이 6호선이었다. 도로 개설을 두고 조선 왕가와 일제 총독부가 대립했을 때 조선 언론은 왕가에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연구가 있다. 시민과 왕가의 편의 중 무엇이 중요한가 하는 문제였지 풍수는 논란의 중심에 선 일이 없다. 일제강점기를 노예의 역사로 배운 사람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이 시기를 연구한 염복규의 논문 '식민 권력의 도시 개발과 전통적 상징 공간의 훼손을 둘러싼 갈등의 양상 및 의미'에는 "민족의 맥을 절단하기 위해 창덕궁과 종묘를 절단했다는 주장은 실재하지 않은 민족 정서를 상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문장이 나온다. 존재하지 않은 허상을 후대가 상상 속에서 가공해 실상으로 만들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서울은 지금 이런 상상에 800억원을 쓰고 있다. 덕수궁에는 '없던 길'을 '있던 길'로 만드는 마술까지 부렸다.

풍수단맥설을 말할 때 경복궁이 반드시 등장한다. 김영삼 정권이 중앙청 건물을 철거할 때 내세운 구호도 "민족정기 회복"이었다. 이런 주장에는 일제가 경복궁 남북에 조선총독부 건물과 총독 관저 건물을 세워 왕가의 맥과 민족의 맥을 끊었다는 관념이 반영돼 있다. 풍수가 눈에는 그렇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경복궁이 가장 화려했을 때 왕실과 관청의 말단 관리까지 권력을 휘둘러 가렴주구하면서 나라가 망했다. 한국이 해방된 것은 총독이 살던 관저의 풍수가 나빠서가 아니라 일본이 세상 모르고 강자에게 덤비다가 원자탄 두 발을 맞았기 때문이다. 일제가 남긴 청사와 관사가 해방 후 한국 정부의 사령부로 쓰일 때 한국은 유례없는 발전을 이뤘다. 중앙청을 철거한 뒤 무슨 정기가 살아났으며 무슨 영화를 누렸는지 알 수가 없다.

청와대 풍수가 나빠 역대 대통령이 불운했다고 한다. 청와대의 광화문 이전을 추진한 유홍준씨의 인식이 이렇다는 것이다. 일제 말기 이 자리에서 생활한 일본인 총독도 불운했다. 패전 후 3명 중 2명이 전범으로 체포돼 종신형을 받았다. 1명은 옥사했다. 이 불운을 두고 한국의 집터가 안 좋아서 변을 당했다고 하면 우리는 기가 찬다. 전쟁 범죄를 저질러 죗값을 치른 것이다. 같은 곳에 산 한국 대통령도 풍수가 나빠 불운했던 게 아니다. 막강한 권력에 도취해 악업을 쌓았거나 주변 관리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탁류처럼 모여드는 권력을 몸부림치며 털어내도 권부에 서린 불운은 피하기 어렵다.

서른넷 청와대 5급 행정관이 육군 참모총장을 카페로 불러내 군 인사를 논의했다고 한다. 정권 초에 일어난 일이다. 동석한 대령은 준장으로 승진했다. 고려 문관 김돈중이 대장군 정중부 수염을 태울 때도 그렇게 새파랗지 않았다. "행정관이 육참총장 못 만날 이유 없다"는 청와대 해명을 들으니 이젠 '미꾸라지' 한 마리의 일탈 행위가 아니라 권부에서 늘 일어나는 일인 모양이다. 세상을 향해 눈치 안 보고 막말하는 사람 뒤에 청와대 누군가가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다른 누군가의 병역 논란은 몇몇 사건에서 양념처럼 거론되다 금기로 굳었다. 풍수가 김두규 교수는 "시대정신과 민심이 등을 돌리면 광화문 청사도 구중궁궐이 된다"고 했는데 지금 청와대가 점점 그렇게 되는 듯하다.

정권이 출범한 지 몇 년이 지났다고 벌써 풍수 탓인가. 청와대가 구중궁궐이 되는 것은 넓어서도 아니고 멀어서도 아니다. 그 안의 사람들이 귀를 닫고 편을 모으고 남을 배척하고 귀엣말을 하는 순간 대통령은 제왕이 되고, 청와대는 고립되고, 권력에 고인 탁류는 썩어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