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1.01.24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박완서 선생님이 끝내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며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나셨다. 남들은 조기퇴직이라도 할 40세 늦은 나이에 등단했지만, 지난 40년간 그는 우리 문단 역사를 통틀어 그 어느 문인보다도 열정적으로 주옥같은 작품들을 발표했다. 1970년 '나목'을 시작으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 등 장편들은 물론, 수없이 많은 단편소설, 수필, 그리고 동화까지 참으로 많은 작품들을 쉴 틈 없이 쏟아냈다.
나는 선생님과의 첫 만남을 잊지 못한다. 2002년 '현대문학'에 '최재천의 자연에세이'를 연재하던 어느 날 난생처음 문인들 모임에 초대를 받아 참석했다. 그 당시만 해도 아는 문인이 몇 없던 터라 그나마 친분이 있는 최승호 시인 옆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따님인 호원숙 작가와 함께 들어오신 선생님은 나보다 대여섯 줄 앞좌석에 앉으시려다 말고 홀연 우리 쪽으로 다가오셨다. 나는 당연히 최승호 시인과 인사를 나누시려니 하고 상체를 뒤로 젖히며 비켜 앉았다. 하지만 선생님은 뜻밖에도 수줍은 듯 따뜻한 특유의 미소로 나를 바라보며 "선생님의 글을 잘 읽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나 황망하여 벌떡 일어나 허리를 굽히며 "아, 예, 선생님"만 몇 번이고 반복했다.
나는 지난 한 달여 동안에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차례로 떠나보냈다. 생명을 연구하는 생물학자에게도 숨이 멎음과 동시에 한 인간의 삶이 그처럼 간단하고 깨끗하게 막을 내릴 수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낯설다. 움직임을 멈춘 몸뿐 아니라 그분들의 말씀, 시선, 그리고 체취도 더 이상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서름하긴 마찬가지이다. 죽음은 어쩌면 이렇게 말끔히 삶의 흔적을 걷어내는 것일까?
박완서 선생님도 이제 다시 뵐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비록 몸은 떠나시더라도 뇌는 남겨두고 가시라고 말한다면 생물학자의 음울한 궤변일까요? 선생님의 그 기막힌 '창작의 뇌'를 잃은 건 인간 집단지능에 결정적 손실입니다. 곁에 계시지는 않더라도 선생님의 이야기는 계속 들을 수 없을까요?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 하시더니 왜 이리 서둘러 가셨습니까? 사랑하는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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