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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천 칼럼] 비메모리 반도체 육성의 허망한 꿈

바람아님 2019. 4. 3. 07:39

조선비즈 2019.04.02. 06:02

 

‘국내 반도체 산업의 호황은 대량 생산체제의 메모리 반도체 분야 일변도이고, 부가가치가 높은 다품종 소량 생산체제의 비메모리 분야는 기술부족으로 수출 실적이 미미해 절름발이 호황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26년 전인 1993년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 내용이다. 변화와 부침이 극심한 IT 업계의 감각으로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다. 당시 한국 반도체 산업은 성장의 가속 페달을 밟기 시작한 상태였다. 과감한 설비투자로 선두 일본을 맹추격하면서 처음으로 반도체 호황의 단맛을 즐기고 있었다. 그때 벌써 메모리와 비메모리 불균형 문제가 거론된 것이다.

정부와 반도체 업계도 메모리 편중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었다. 삼성전자, 현대전자, 금성일렉트론 등 3사는 2000년까지 비메모리 분야에서 세계 10위권에 올라선다는 야심적인 목표를 세웠다. 미국 비메모리 업체를 인수하는 등 투자를 크게 늘려나가다 외환위기의 충격으로 제동이 걸렸다.


이후 정부는 1998년과 2011년에 각각 ‘시스템 IC 2010’과 ‘시스템 IC 2015’라는 국책사업을 추진했다. 정부와 민간을 합쳐 모두 1조원을 투입해 시스템 반도체 산업을 체계적으로 육성하겠다고 했다. 성과가 없지는 않았다. 시스템 반도체 세계시장 점유율이 1% 수준에서 5% 정도로 늘어났다.

하지만 당초 기대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다. 세계 반도체 시장의 65%를 차지하는 비메모리 분야에서 한국은 여전히 존재감이 별로 없다. 특히 지난 몇년간 메모리 시장이 초호황을 구가하면서 메모리와 비메모리 격차가 더 벌어졌다. 반도체 설계만 전문으로 하는 팹리스(fabless) 업계의 매출 상위 10대 업체 중 절반이 작년에 적자를 냈다.


2015년 이후엔 아예 비메모리 육성 정책 자체가 없었다. 시스템 반도체 산업을 지원하는 예산은 꾸준히 편성됐지만 체계적인 정책 프로그램은 사라졌다. 메모리 호황에 취해 관심이 시들해진 데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잘 안된다는 사실이 드러난 영향이 컸다. 효과가 없으니 관련 정책에 대한 의지가 약화됐다.

그런데 최근 정부가 다시 비메모리 육성에 나서기로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9일 국무회의에서 "메모리 반도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취약한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의 경쟁력을 높여 메모리 반도체 편중 현상을 완화하는 방안을 신속히 마련해주기 바란다"고 지시했다.


메모리 편중은 한국 경제의 구조적 약점 중 하나다. 메모리 시장은 경기 부침이 매우 심하다. 메모리 가격이 폭락할 때마다 한국 경제도 큰 어려움을 겪었다. 반도체 불황으로 인한 무역적자 급증이 외환위기로 이어지기도 했다. 최근 수출이 4개월 연속 감소세를 나타내며 경제 불안감을 자극하고 있는 것도 반도체 가격 하락의 영향이다.

비메모리는 시장 규모가 메모리의 2배 가까이 되는 데다 가격 변동성이 훨씬 작고 안정적이다. 비메모리 육성이 한국 반도체 산업만이 아니라 한국 경제의 오랜 숙원이고 과제인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를 위해 정부가 어떤 역할을 하고,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분명치 않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정부는 1998년부터 2015년까지 무려 18년 동안 시스템 반도체 육성 사업을 시행했다. 특정 산업 분야를 키우기 위해 정부가 이렇게 장기 프로젝트를 추진한 사례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성과가 미미했다. 정부가 앞으로 내놓을 ‘시스템 IC 2025’ 같은 사업은 과거와 다를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메모리와 비메모리 산업은 속성이 전혀 다르다. 메모리는 표준화된 제품을 대량 생산하는 시스템이다. 막대한 설비 투자가 중요하다. 먼저 공정기술을 익히고 점차 설계기술을 고도화하는 경로를 밟을 수 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이 그런 방식으로 성장했다.

반면 비메모리는 다품종 소량생산 시스템이다.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고, 고난도의 설계 능력을 갖춰야 한다. 지적 자산 축적과 우수 인재 확보가 성공의 알파와 오메가다. 생산은 ‘파운드리’로 불리는 위탁생산 전문업체에 맡기면 된다. 설비투자와 공정기술에 의존하는 한국식 성장 방정식은 통하지 않는다. 정부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도 별로 없다.


그런데 정부가 왜 갑자기 비메모리 육성을 들고 나온 걸까. 정부에 앞서 삼성전자가 비메모리 사업 강화에 적극 나서고 있다는 사실이 우연이 아닐 수 있다. 삼성은 2030년까지 비메모리 세계 1위를 목표로 하고 있다. 특히 스마트폰 두뇌 역할 등을 하는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와 전장(자동차 부품) 반도체에 역점을 두고 있다.


결과는 장담할 수 없다. 그렇다고 정부가 손을 거드는 게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남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얹고 생색만 내려는 속셈으로 비칠 수 있다. 정부가 끊임 없이 경제력 집중 시비를 걸면서 삼성의 반도체 설계 인력 확보 등을 지원하겠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태도다. 삼성이 열심히 하도록 그냥 놔두는 게 더 나을 것이다.


비메모리 육성에 앞서 정부는 먼저 과거 정책이 왜 실패했는지부터 살펴야 한다. 정부가 수많은 비메모리 사업 중 집중 육성할 분야와 품목을 골라내고, 설계 전문 팹리스 기업을 키워내는 게 가능할지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 정부 정책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한 뒤 비메모리 산업의 생태계 조성을 위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을 판단해야 한다.


정부가 비메모리 육성 방안을 서두르면 서두를 수록 졸속, 날림이 되기 십상이다. 업계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다. 대통령의 말 한 마디에 갑자기 부산을 떠는 방식으로는 비메모리 육성이 또 한번의 허망한 꿈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