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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세계 최초' 라는 '체면'에 목메는 나라

바람아님 2019. 4. 10. 07:35

(조선비즈 2019.03.23 김주현 정보과학부 부장)


닷컴 광풍이 불던 1990년대말과 2000년대초다.

그시절 신문에는 ‘세계 최초 개발' ‘세계 최초 서비스' 등 벤처기업들이 내놓은 ‘세계 최초'가 범람했다.

무언가 ‘세계 최초'를 내놓은 벤처기업들은 신문 기사를 들고 창투사를 찾아 투자를 받았다.

그 ‘세계 최초’는 사업성 검토가 필요없었다. ‘세계 최초'니까.


그래서 ‘광고를 보면 돈을 준다'는 골드뱅크는 수많은 투자를 받아 순식간에 그룹으로 커졌다.

프로농구단도 운영했다.    ‘세계 최초'로 인터넷 전화를 선보인 새롬기술에 100만원을 투자한 사람은

주가가 뛰면서 억대 부자가 됐다는 소문도 났다.


하도 시장의 돈이 정보기술(IT) 기업과 텔레콤 기업에 몰리는 터라 해프닝도 있었다.

뭉칫돈을 들고 온 투자자가 신라호'텔'에 투자했다는 것이다.

‘텔'이 붙어서 텔레콤 기업인 줄 알았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그때는 정말 이쑤시개에 지우개를 붙여서 ‘세계 최초'라 주장해도 투자를 할 기세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은 여전히 ‘세계 최초'에 열광한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그렇게 쏟아진 ‘세계 최초’ 중에서 성공한 것은 거의 없다.

당시 수많은 벤처가 내놓은 ‘세계 최초’는 소리소문없이 사라졌고, 그나마 실물로 제품을 내놓은 것도 재미를 못봤다.


한국 기업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MP3플레이어는 세계인 기억에도 없다. 애플의 ‘아이팟'만 살아 남았다.

지금 생각하면 애플 앱스토어의 원조 격인 삼성전자의 ‘애니콜랜드'는 그런 서비스가 있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애니콜랜드는 1998년부터 시작한 서비스로 삼성폰을 쓰는 사람들이 각종 음원이나 서비스를 다운받는 것이었는데

한 때 가입자가 전세계 3000만명을 넘어서기도 했다.


‘세계 최초'가 망한 것들은 많다. 삼성전자 주도로 2001년부터 시작했던 e스포츠 제전인 월드사이버게임즈(WCG)는

10년여를 열다가 끝났다.

라이엇게임즈 등 대륙별로 WCG 행사를 돕던 기업들만 e스포츠 업계의 주류로 살아남았다.


2000년 초중반 당시 정보통신부 주도로 만든 DMB나 와이브로도 망했다.

DMB는 유럽에서 만든 디지털라디오방송 규격에 영상칩을 붙인 ‘세계 최초' 이동형 방송 규격이었다.

정부는 DMB가 모바일 방송의 혁신이라며 세계 시장을 주도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해외 진출은 커녕 지금은 국내 방송 시장의 0.1%를 차지할까 말까 하는 수준이다.


와이브로는 KT에 이어 SK텔레콤이 사업을 접었다.

유선에 기반한 이동통신 서비스로 전국을 광대역 인터넷이 가능하게 만들고, 해외 시장을 개척한다고 했지만

해외로 나가기는 커녕 국내서 이동통신에 밀려 구닥다리가 됐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이동통신업체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IMT 2000도 "아 서비스 하긴 했군" 수준에 그쳤다.

시장이 제대로 형성되지도 않고 수요에 대한 제대로 된 분석도 없는데 ‘세계 최초'라고 막연하게 먼저 도입한 결과다.

그 결과 한국이 얻은 것은 ‘글로벌 테스트 배드'라는 ‘명성'이다.

신기술을 가장 먼저, 가장 많은 비용이 들더라도 초기에 도입하는 나라.

이 기술이 시장에 먹힐까 싶으면 한국을 살짝 건드리면 된다.

이건 기술 도입이 빠른 역동적인 IT 강국이라기 보다는 그냥 글로벌 ‘호구'라는 인증이다.


학습효과가 없는 것인지 이 나라는 여전히 ‘세계 최초'에 목을 맨다.

얼마전 미국 버라이즌이 5세대(G) 이동통신 서비스를 4월 초에 상용화한다는 외신 보도가 나오자 통신업계가 뒤집혔다.

한국은 지난해말 시범서비스를 했지만 실제 소비자들이 이용하는 단말기는 4월 중순이 지나서야 나올 판이라,

버라이즌이 모토로라 단말기로 5G 서비스를 하면 ‘세계 최초'라는 ‘명예'를 빼앗기게 된다는 것이다.


언론에서 결국 삼성전자 단말기 조기 공급이 관건이라는 말에 삼성전자만 바빠졌다.

갤럭시 S10 5G폰은 전파 인증을 받고 어떤 통신사는 망 연동 테스트를 끝냈고 일부서는 진행 중이다.

4월 11일에 버라이즌이 5G단말기 시판을 한다 하니, 5일쯤 공급하려는 분위기다.

왜? 5G 상용화를 ‘세계 최초'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도 SK텔레콤이 신청했던 5G 요금제를 퇴짜놨다가 다시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SK텔레콤은 5만~6만원대 요금제를 추가해 정부에 다시 인가를 신청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냉정하게 생각하면 5G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도, 세계 시장 진출 교두보도 아니다.

그냥 이 정권에서 ‘세계 최초'로 도입한 서비스라는 ‘자화자찬’ 이외에는 별 의미가 없다.

유럽은 이탈리아가 5G 도입을 고민한다고 하지만 아직 3G도 제대로 깔리지 않은 나라가 수두룩하다.

중국이나 일본도 2020년 이후나 상용화한다고 한다. 지금 5G를 해봐야 단말기는 내수용이고,

수출은 버라이즌이 서비스 한다하니 미국이나 조금 할까 싶다. 게다가 장비는 어디에 팔까.


더 재미있는 것은 5G와 관련된 제도가 하나도 정비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부가 팔아먹을 상품도 없는데 일단 좌판부터 깔라는 격이다. 5G는 초저지연성이 특징이라 한다.

실시간 교통상황을 바로 반영해서 자율주행에 최적화된 통신이라 한다. 그런데 한국은 자율주행과 관련한 법이 없다.

도로교통법은 개정도 안됐고, 자동차 보험 등 관련 제도는 손도 못대고 있다.

멀리 떨어진 낙도의 환자를 로봇을 통해서 의사가 원격 진료 내지는 수술 할 수 있다는데, 우리는 원격진료가 허용 안된다.

5G로 실시간 제어된다는 드론은 국내 법에 막혀서 장난감 드론도 서울 시내서 제대로 뜨지 못한다.

막말로 5G를 도입해도 돈 벌 서비스가 없다.


그러니 기껏 통신사들이 내놓은게 프로야구를 VR로 생중계 하겠다는 거다.

제대로 된 서비스 하나도 없고 5G로 바뀌는 산업 환경에 대한 법과 제도 개선이 없는 상태에서 강행되는 서비스는

대체 무슨 의미일까? 그냥 문재인 정부가 이런 거 했다는 ‘체면' 치레 아닐까 싶다.


통신업계 한 관계자는 "정부 당국자들은 마치 세계 최초로 서비스하면 시장이 저절로 따라오는 줄 아는 것 같다"며

"5G용 서비스 기반도 갖춰지지 않았는데 세계 최초에 목매는 것을 보면 시장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정책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겁 먹은 강아지가 짖는다"는 말이 있다. "깊은 강은 소리 없이 흐른다"는 말도 있다.

내세울 꺼 없는 정부가 오죽했으면 ‘세계 최초'에 목메나 싶다. 그래도 실속 챙기는 게 더 중요하다.

지난 세기 우리는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고 했다.

지금은 이렇게 말하고 싶다. "5G는 ‘세계 최초'로 상용화 한다지만 6G는 세계에서 한 세번째 정도로 도입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