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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만하면.. '화폐개혁' 왜 끄집어내나/[나현철의 시선] 뜬금없는 리디노미네이션 논란

바람아님 2019. 4. 23. 08:32

잊을 만하면.. '화폐개혁' 왜 끄집어내나

머니S 2019.04.23. 06:08


한국은행 총재의 스쳐가는 리디노미네이션 발언으로 화폐개혁 논의가 대한민국을 또 강타했다. 일각에선 정치적 이슈를 고려한 존재 과시용 군불때기일 뿐이라며 폄훼하지만, 또 다른 진영에선 침체된 경제의 불씨를 되살릴 불쏘시개가 될 것이라 목소리를 내고 있다. 대한민국의 원화가 상대적으로 저평가 됐다는 시각에는 모두가 공감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현 시점이 1000원의 액면가를 1원으로 줄여야하는지에 관해서는 저마다들 말이 참 많다. 확산된 논란이 부담스러웠는지 한국은행도 은근슬쩍 발을 빼려는 모양새다. ‘머니S’는 변죽만 울리는 화폐개혁의 본질을 알아보고 지금 왜 이 논쟁이 필요한지 짚어봤다.
[편집자주]
        

[또… 변죽 울리는 ‘화폐개혁’] ②동력 약하면 ‘후폭풍’ 온다

화폐개혁 이슈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리디노미네이션 계획이 없다며 입장을 번복했지만 다음달 정책 토론회가 예정돼 있는 등 이슈는 현재 진행형이다.

지난달 화폐개혁 이슈가 부각됐을 때부터 후폭풍에 대한 우려 등으로 현실화 가능성을 낮게 보는 시각이 있었다.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시기상조라는 지적이다.


국내외 불확실성이 커진 가운데 화폐개혁을 강행할 만한 경제 여건도, 화폐개혁을 이끌 만한 적임자도 마땅치 않은 상황이다. 무리하게 강행한다고 해도 지하경제 양성화 등 실효성이 미지수인데다 인플레이션 등 부작용 우려도 만만찮아 장밋빛 전망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분위기다.


◆두차례 화폐개혁… 득실 엇갈려

화폐개혁 이슈는 지난달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업무보고 자리에서 “리디노미네이션을 논의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발언해 촉발됐다.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 단위를 줄이는 화폐개혁의 일종이다. 이를테면 1000원에서 뒷자리 0 세개를 떼어내 1원으로 낮추는 식이다.
/사진=이미지투데이

표면적으로는 단순히 단위만 바뀌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체감적으로 화폐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며 지하경제 양성화라는 취지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철저한 준비가 동반돼야 한다.

문제는 장롱 속의 돈을 끌어낼 방안이 마땅찮다는 것이다. 과거 박종규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내놓은 리포트에 따르면 1953년 1차 화폐개혁은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1962년 단행한 2차 개혁은 실패한 사례로 꼽힌다. 액면을 10대1로 바꾸면서 구권을 전액 신권으로 교환해주는 과정에서 지하자금을 시장으로 끌어내는 데 실패한 것이다.


당시 정부는 구권 일부만 신권으로 교환해주고 나머지는 1년간 강제예금시킬 계획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반대로 예금동결을 시행한 지 한달 만에 무산되면서 교환받은 신권이 다시 장롱 속으로 숨어들었다. 당시 도매물가 상승률도 10%대여서 무리하게 화폐개혁을 시도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 시장의 평가다.


◆불안한 경제 상황… 독 될 수도

현 상황을 자세히 보면 당시와 유사한 점이 많다. 장롱 속의 돈을 끌어낼 방안을 만들어 낼지 여전히 미지수다. 시대가 변한 상황에서 강제예금 제도 등으로 지하경제 양성화를 꾀하면 시장 논리에 어긋나 강한 반발에 부딪힐 게 불 보듯 훤하다.

화폐단위를 변경하면 인플레이션(화폐가치 하락으로 인한 물가 상승)이 가장 큰 문제점으로 거론된다. 1000대 1로 바뀌면 100만원 하던 물건 가격이 1000원으로 낮아지는 데 달라진 화폐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최소 수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 전언이다. 경기가 좋지 못한 상황에서 인플레이션은 심각한 경제위기를 초래할 위험이 크다.


화폐단위를 조정하면서 단위 끝자리에 오름 원칙이 적용될 경우도 고민해야 한다. 한 예로 1만9900원이 19.9원이 아닌 20원으로 되는 식이다. 소수의 상품만 놓고 보면 미미하지만 전 산업으로 범위를 넓히면 무시할 수 없는 규모다.

실패 사례로 꼽히는 1962년에 비해서도 화폐개혁의 동기부여가 약하다. 실업률과 물가 상승, 국내 경기 하방리스크가 확대되는 상황에서 화폐개혁까지 강행하면 혼란이 더해질 수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실업률은 3.5%로 13년 만에, 소비자물가상승률은 2.0%로 6년 만에 각각 최고치를 기록했다.


특히 이번 정권 들어 소득주도성장, 남북관계의 급진전 등 국내 이슈와 미국의 금리인상 정책, 미중 무역분쟁 등 국내외 불확실성이 맞물린 상황에서 화폐개혁은 자칫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돈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이해관계가 완전히 엇갈린 만큼 물가가 오르는 것은 뻔한 일”이라며 “소득주도성장 시행으로 혼란을 겪는 가운데 경제 불안, 미중 무역분쟁 등 곳곳이 성장의 지뢰밭이라 적절치 못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화폐개혁의 현실적 어려움

다음달 화폐개혁과 관련한 정책 토론회가 예정돼 있지만 현실적으로 실행 자체가 버거운 상황이다. 화폐개혁은 정치권과 정부 등의 공조가 이뤄져야 가능한데 이를 이끌만한 적임자가 마땅치 않다는 점이 문제다. 자칫 정치적 논리로 흘러갈 수 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김수현 정책실장의 경우 부동산 전문가로 분류되고 강기정 정무수석도 화폐개혁을 추진할 만한 이력이 부족하다는 평이다. 윤종원 경제수석이 단독으로 진행하기도 무리가 따른다. 정부 역시 화폐개혁을 검토하지 않고 있다며 선을 그은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분위기 반전용으로 화폐개혁 카드를 꺼내든 것 아니냐는 시선을 보낸다. 청와대는 지난해 말 확대경제장관회의에서 올해 경제정책 방향으로 소득주도성장의 속도를 조절하고 대신 경제활력 회복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소득주도성장을 대체할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으로 화폐개혁을 제시하면서 시장 분위기를 살펴본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 총재의 번복도 이런 분위기에 부담을 느낀 측면이 적지 않아 보인다.


김 교수는 “현실적으로 화폐개혁이 이뤄질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며 “소득주도성장 등 경제 패러다임을 바꾸려는 과정에서 발생한 경제적 어려움의 반등 차원이거나 국면전환용으로 화폐개혁을 꺼낸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는 “경제 상황이 매우 좋지 못하고 제조업의 경우 더 힘든 상황인 만큼 화폐개혁 동력이 약하다”며 “장기적으로는 화폐개혁이 필요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본다”고 밝혔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89호(2019년 4월23~29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장우진 기자 jwj17@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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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현철의 시선] 뜬금없는 리디노미네이션 논란

중앙일보 2019.04.22. 00:09

 

한은 총재가 "필요하다" 제기
금융 90%가 전자거래되는 시대
화폐단위 바꾸는 게 의미 있을까
나현철 논설위원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요즈음 언론을 타고 있다. 한은의 본업인 금리 문제가 아니라 화폐단위 개혁(리디노미네이션) 때문이다. 그는 지난달 25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업무보고에서 “리디노미네이션을 그야말로 논의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이 연구는 꽤 오래전에 해 놓은 게 있다”고 했다.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의 액면을 동일한 비율의 낮은 숫자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1000원을 1원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이 총재는 2015년 9월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당시 새누리당의 한 의원이 “화폐개혁이 필요하지 않은가”라고 묻자 “필요성은 공감한다. 다만 한은이 독자적으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적 공감대가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정권이 바뀌어도 계속 제기할 만큼 한은 총재의 리디노미네이션 소신은 강한 것 같다.


이 총재의 말이 아니더라도 실제 주변에서 화폐단위로 인해 겪는 불편이 있긴 하다. 물건값은 이미 최소 100원 단위로 매겨져 있는데 뒤의 ‘00’을 더 적는 건 어쩌면 낭비다. 이 때문에 어떤 커피숍에선 5000원을 5.0으로, 2500원을 2.5로 적는 식으로 자체적인 리디노미네이션을 하기도 한다. 환율 계산 때의 불편함도 거론된다. 미국 달러에 대한 원화 가치는 현재 1달러당 1136.50원이다. 일본 엔화에 대해선 100엔당 1015.46원이다. 일각에선 이런 점을 들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달러 당 가치가 네자릿수인 나라는 없다’며 한 나라 경제의 위상을 반영하는 원화의 가치를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1998년부터 주요 통계에 1000조 단위를 뛰어넘는 경(1 뒤에 ‘0’이 16개)이 등장했다는 얘기도 덧붙인다.


하지만 화폐가치 변경은 국가 대사 중의 대사다. 모든 국민의 일상이 바뀌고 사회 변화까지 불러온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와 여건이 조성돼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 자체 리디노미네이션을 하는 가게도 있지만, 중소기업에선 여전히 원가 계산에서 1원을 따진다. 국가 통계를 계산할 때 숫자가 커지는 불편은 잘해야 한은과 기획재정부 등 일부 부처의 일부 공무원에 해당하는 일이다.


화폐단위가 경제의 위상을 반영한다는 얘기는 더 납득하기 어렵다. 미국 달러가 1100원대라고 해서 미국 경제가 한국의 1100배인 것은 아니다. 일본은 달러의 10분의 1 가격인 엔화로도 1980년대 세계 경제 1위 자리를 노린 바 있다. 1리라당 원화가치가 200원이라고 해서 터키 경제가 한국보다 200배 더 좋은 것도 결코 아니다. 현재 세계에서 화폐가치가 가장 높은 나라들은 쿠웨이트·바레인·오만 같은 중동국가들이다. 이들 나라는 석유 덕분에 부국이 됐지만, 사회적 불평등이나 민주주의 체제에서 심각한 문제를 나타내고 있다.


더구나 지금은 디지털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금융거래만 해도 90%가량이 컴퓨터나 휴대전화로 이뤄진다. 5만원이나 만원짜리 뿐 아니라 10원이나 100원도 IC 카드가 알아서 계산한다. 현금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는 세상에서 굳이 화폐단위를 바꿔 혼란을 초래할 이유가 있는지 의문이다. 과거 역사를 봐도 경제에 문제가 없는 평화 시에 굳이 화폐단위 변경을 한 경우가 거의 없다.


우리의 경험도 이를 뒷받침한다. 전쟁통에 치러진 긴급조치였던 1950년 1차 통화 조치를 빼고 1953년과 1962년 두 차례의 리디노미네이션이 있었다. 첫째는 전쟁으로 인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고육책이었고, 둘째는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부의 경제 다잡기 의도가 강했다. 하지만 현금과 예금 동결로 산업이 더 위축돼 박정희 본인이 인정한 실패로 끝났다.


유럽이 유로화를 채택한 즈음 미국과 유럽을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장 간 적이 있다. 당시 1유로 가치는 1.4달러 정도였다. 공항에서 물 한 병씩을 사려고 했는데 미국에선 모두 1달러, 유럽에선 1유로여서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0.88유로로 표기하느니 아예 1유로를 붙여놓는 것처럼 화폐단위라는 마술 때문에 자연스레 물가 상승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화폐개혁으로 20억원짜리 아파트가 2000만원이 됐다고 해서 그 가치가 바뀌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지금은 꺾이는 경기를 되살리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할 시기다. 3조원을 넘게 들여 돈을 새로 찍어내고 은행과 여러 전산기기의 단위를 바꾸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지금은 지갑과 주머니에 10원짜리부터 5만원짜리까지를 넣어두고 있어야 생활이 가능한 시절이 아니다. 100원, 1000원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국민의 수치 이해력이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여러모로 지금 얘기되는 리디노미네이션은 영 뜬금없이 느껴진다.


나현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