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67] 장보고의 청해진

바람아님 2019. 4. 17. 10:58

(조선일보 2019.04.17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큰항아리, 청해진 유적, 국립나주박물관.큰항아리, 청해진 유적, 국립나주박물관.

우리 역사에서 장보고만큼 글로벌한 인물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에 관한 '영웅적 스토리'가 중국이나 일본에도 남아 있다.

그는 낮은 신분이란 한계에서 벗어나려고 당(唐)으로 건너가 출중한 무예로 성공했다.

신라인들이 당으로 잡혀와 노예로 팔리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그는 귀국 후

흥덕왕에게 해적 소탕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청해진 설치를 건의했다.


청해진 대사로 임명받은 장보고는 해적을 소탕하는 한편 해상 교역로를 장악해

당·신라·일본 사이의 교역에 관여하며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러나 왕위 쟁탈전이

한창이던 신라 정치 무대는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결국 싸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서라벌에서 보낸 자객에게 암살되고 말았다. 조정은 청해진을 없애고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청해진에 다시금 조명이 가해진 것은 1982년의 일이다.

그해 가을 문화재연구소 조사단은 전남 완도군 장좌리 일대에 대한 지표조사에 나섰다.

완도 본섬에서 동쪽으로 180m가량 떨어진 작은 섬 장도(將島)는 섬 전체가 하나의 방어 시설로 조성되어 있어 특이했다.

조사단은 그곳이 청해진의 옛터일 가능성을 확인했고 1991년부터 2001년까지 곳곳을 발굴해 유적의 실체를 밝혔다.


섬을 에워싼 토축 성벽은 견고했고 길이가 890m에 달했다.

해변을 따라가며 조밀하게 시설된 목책(木柵)은 펄에 잠겨 있었기에 보존 상태가 매우 좋았다.

성안에서는 정연한 구조를 갖춘 건물지가 여러 채 드러났고 중국 청자와 당나라 동전을 비롯한 유물이 쏟아졌다.

특히 구덩이 하나에는 큼지막한 항아리와 함께 토기, 쇠솥, 청동그릇 등이 가득 들어 있었다.

모두 장보고가 활약했던 9세기의 물품이다.


청해진 유적 발굴 후 장보고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높아졌다.

그의 활약상을 소개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가 영웅인지 혹은 반란의 우두머리인지를 둘러싸고 다양한 논의가 전개됐다.

역사에 가정은 있을 수 없지만 청해진이 오랫동안 번성했다면 9세기의 신라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