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68] 동래읍성 해자 속 백성들의 주검

바람아님 2019. 4. 24. 09:21

(조선일보 2019.04.24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 1만8700명은 700여척의 배로 부산포를 침략했다.

이튿날 새벽부터 시작된 전투에서 부산진첨사 정발이 장졸들과 함께 분전했지만 몇 시간 버티지 못하고 모두 순절했다.

이틀 후 왜군은 동래성 공략에 나섰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는

왜군의 최후통첩에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내줄 수는 없다(戰死易假道難)'며 대적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고 송 부사를 비롯한 장졸과 백성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투구, 동래읍성 해자, 부산박물관.
투구, 동래읍성 해자, 부산박물관.


그 후 400년이 더 지난 시점에 그들 중 일부의 유해가 비참한 모습을 간직한 채 발굴됐다.

경남문화재연구원 조사원들이 2005년 7월부터 부산 도시철도공사 수안역사 건설 부지에서 발굴을 진행하던 중

정연한 형태의 석축열 두 줄을 찾아냈다. 조사가 진전되면서 동래읍성 해자(垓字)의 가장자리 석축임이 밝혀졌다.


해자에 매몰된 흙을 걷어내고 바닥 쪽으로 내려가니 방어용으로 박아 놓았던 나무 말목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조심스레 노출하는 과정에서 오랜 세월 펄 속에 묻혀 있던 다양한 유물들이 쏟아졌다. 활, 화살촉, 창, 갑옷과 투구 등

전장에서 쓰인 것이 많았고 투구 1점에는 동래진상(東萊鎭上)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어 조선군의 유품임을 알 수 있었다.


이어 조사원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보존 상태가 양호한 인골들이었다.

남성 59개체, 여성 21개체, 소아 1개체 이상이라는 인골 전문가의 감정 결과가 나왔다.

예리한 칼날에 베이거나 총알 혹은 화살의 관통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일부에서는 처형의 흔적도 확인됐다.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동래부 백성들은 무참히 학살되었고 그들의 주검조차 거둘 사람들이 없었기에 차디찬 해자 속에

내버려졌던 것이다. 조선 전역을 유린하며 살상을 자행한 왜군의 잔학함은 말할 것도 없지만 백성들을 지켜주지 못한

조선 조정도 학살의 방조자에 다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