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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관승의 리더의 여행가방] (42) 포르투갈 신부가 바라본 임진왜란.. 조선과 일본의 진짜 얼굴

바람아님 2019. 6. 2. 08:19

조선비즈 2019.05.31. 05:00


1990년대 어느 날 삼성경제연구소 임원들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으로부터 이례적인 연구과제를 지시 받고서 몹시 당황하였다. 평소 경제연구소에 직접 과제를 내주는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문 받은 연구과제란 바로 이것이었다.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과 일본의 GDP를 비교조사 연구해보세요!"

포르투갈의 사제 루이스 프로이스는 뛰어난 일본어 실력으로 오다 노부가나 등 일본 최고 실력자들과 교류를 다졌다. 왼쪽이 오다 노부나가, 오른쪽이 루이스 프로이스./사진=위키피디아

우선 임진왜란이 발생했던 1592년 당시의 GDP산출 방식과 근거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기술적인 접근방식이 쉽지 않았지만 보다 더 어려웠던 것은 과제를 내준 회장의 의도파악이었다.

삼성경제연구소 관계자들은 며칠 내내 회의를 거듭했지만 결국 의도 파악을 포기하고 조사에 돌입했다. 당시 양국의 호적에 등재된 인구수와 세금으로 거둬들인 쌀과 곡식 등의 통계를 수집했다. 이를 근거자료로 해서 어렵사리 연구를 진행하던 어느 날, 연구자들은 무릎을 탁 쳤다고 한다.


"임진왜란을 일으킬 무렵 조선은 군사력뿐 아니라 인프라와 경제 전반에 걸쳐 이미 일본에 압도당하고 있었다는 가설을 마음 속에 갖고서 그것을 객관적으로 입증해보려고 우리에게 그런 과제를 주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벌써 20여 년 전 삼성경제연구소 고위 관계자에게 들었던 에피소드다. 결과적으로 이 연구과제는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임직원 회의에서 이건희 회장이 ‘마누라와 자식을 빼고 다 바꾸라’는 이른바 '신경영' 선언과 맞물리게 된다.

소니 등 일본기업을 꺾고 전자산업과 반도체 분야에서 1위에 올라서겠다는 최고 경영자로서의 야심이었다.

루이스 프로이스가 쓴 ‘일본사’./사진=위키피디아

당시 이 연구에 도움이 되었던 한 권의 책이 있었다. 루이스 프로이스(Luís Fróis)가 쓴 ‘일본사’(HISTORIA DE JAPAM)란 책으로,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기 훨씬 이전이다. 프로이스는 1532년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태어나 16살의 나이에 예수회 회원이 되었고, 인도로 가서 교육을 받은 뒤 사제 서품을 받았다.


프로이스가 일본에 처음 도착한 것은 16세기 중반인 1563년이었다. 1597년 나가사키에서 사망할 때까지 가톨릭 사제로서 대부분의 시간을 일본에서 보낸 일본전문가다.

그는 풍운이 몰아치던 일본의 정치상황을 직접 목격하고 기록하였다. 그는 뛰어난 일본어 실력으로 오다 노부가나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직접 회견하였던 매우 드문 서양인이었다.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계획하고 준비하며 지시하며, 명나라와의 강화협상 등 모든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보았기에 더 큰 의미를 지닌다.


"관백은 일본인들의 기질이 본래 변덕이 심하고 전쟁이나 반란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어 이러한 기질을 바꾸지 않고서는 이들의 영국(領國)을 실로 별 탈없이 원활하게 통치하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관백은 그들을 위무하고 상황이 조용해지고 나면 자신의 뛰어난 능력과 열정으로 이 중국 정복 과업에 그들을 동원하기로 결심했다."

여기서 말하는 관백이란 일본어로 ‘간바쿠’, 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당시의 직위를 말한다. 이 분석을 보면 평소 의심이 많은 도요토미가 일본 천하를 통일한 뒤에도 반역을 두려워해 주요 영주와 제후 그리고 무장들을 조선과 중국 전장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바라본 것이다.

포르투갈인들이 일본에 정기적으로 항해하던 범선 ‘캐랙’(Carrack). 일본어로는 쿠로후네(黑船)라 하는 검은 돛배다. 이 그림 등을 통해 당시 일본의 경제상황을 추정해 볼 수 있다./사진=위키피디아

16세기 후반의 동아시아의 급변하는 상황을 현지에서 다룬 ‘일본사’ 중의 일부가 임진왜란 때의 기록이다. 이 부분만 발췌한 내용을 묶어 한국에서 따로 펴낸 것이 ‘임진난의 기록’이다.

이 책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일본의 정치상황과 경제상황을 제 3자의 눈으로 비교한 매우 귀중한 자료다. 그 당시 마카오와 일본 나가사키를 오가는 정기항로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또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약 50년 전 이미 일본은 포르투갈 상인들로부터 서양식 총을 전수받아 최초로 ‘화승총’을 만들게 됨으로써 군사력에 일대 혁신을 이루고 기술발전을 이루게 된다.


더 흥미로운 것은 프로이스 신부가 아고스티뉴의 보고서와 가톨릭 신자를 중심으로 조선과 임진란을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있다는 점이다. 아고스티뉴란 선봉대로 조선에 왔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의미한다. 그는 아우구스티뉴스라는 세례명을 받은 가톨릭교도였고 가토 기요마사(加䕨淸正)와 숙명의 라이벌관계였다.

"관백의 명령에 따라 히고국(肥後國)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아고스티뉴 쓰노가미가 즉시 원정을 위한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그의 깃발 아래 데려간 사람들은 모두 시모(下) 지방의 가톨릭교도 영주였다. 이들 중 아리마 영주인 동 프로타지우는 모든 높은 신분의 귀족 중에서 가장 빛나 보였고, 전쟁에 관해서는 가장 정확하고 주도면밀 했기 때문에 모든 종류의 무기와 장비에서도 틀림이 없었다."

‘일본사’의 원본에 남은 프로이스의 필체./사진=위키피디아

히고국이란 현재 규슈지방의 구마모토 현을 말하고, 동 프로타지우란 포르투갈 말로 귀족이나 고귀한 사람을 나타내는 ‘동’이란 단어와 세례명을 섞은 것으로 아리마 하루노부를 가리킨다.

조선에 왔던 가톨릭교 병사들은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의 장병들로 시모(下)지방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프로이스는 시종일관 조선을 ‘코라이’(Coray)로 표기하고 있다.


이 책에서 프로이스는 조선에 파견된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가 보내온 두 통의 편지도 소개하고 있다. 세스페데스는 스페인출신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요청으로 일본인 수사 한칸 리앙과 함께 1593년 12월 27일 한반도에 와서 종군신부로 활동했으며 지금의 진해 부근에 1년 반 체류하였다. 두 사람의 활동시기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네덜란드 사람 하멜보다 60년 정도 앞선 때였다.


프로이스는 ‘일본사’ 이외에도 예수회와 일본에 파견된 신부들 사이에 오간 편지를 묶은 ‘일본 연례 서간문집’도 냈다. 그의 집필방식은 예수회 서간문에서 하나의 모델로 평가될 정도였다.

프로이스는 1597년 나가사키에서 숨을 거둔다. 그 다음해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일본군이 퇴각함으로써 7년 전쟁은 막을 내린다./사진=위키피디아

당시 가톨릭의 보고서를 보면 일본 권력의 심층부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매우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예리한 눈과 기록정신, 이를 보고서로 남긴 필력은 현대의 외교관이나 상사주재원, 특파원, 혹은 정보기관원 못지 않다.


프로이스는 정유재란이 한창이던 1597년에 6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일본군이 퇴각한 것은 1598년, 그리고 명나라의 주력군대가 한반도에서 물러난 것은 1599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420년 전의 일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객관적 기록을 읽는 것은 언제나 편치 않다. 우리의 아픈 상처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발 더 나가려면 그 상처를 정면에서 들여다보는 용기가 필요하다. 출장 가방에 위대한 기록자 프로이스의 저작을 넣어가는 이유다.

   
손관승·언론사 CEO출신 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