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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현의 마음읽기] "포기했어요" 이 한마디… 평온과 행복의 열쇠

바람아님 2019. 4. 18. 07:14

(조선일보 2019.04.16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행복은 기본 감정'이라는 틀… 오히려 우리를 불행하게 해
마음 병 고통받다 웃음 찾은 분들, '포기했다'는 답변 많아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승자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포기하는 사람은 절대 승자가 될 수 없다'란 말이 익숙하다.

하려는 일을 그만두어 버림이라는 뜻의 포기, 삶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선 마음에서 떨쳐 버려야 할 적이라

들었기에 포기에 대해 긍정적인 느낌을 갖고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불안·우울 등 마음의 증상으로 고통받으시다가 밝은 마음을 찾으신 분들께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는지 여쭈면 환하게 웃으며 '포기했어요'라고 답하는 분이 많다.

포기가 좌절을 가져와야 하는데 오히려 마음에 평안함과 얼굴에 웃음을 가져오는 상황이다.

소통의 도구인 언어의 주인은 사람이지만 때론 언어가 하나의 틀이 되어 주인처럼 우리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인간의 기본 감정은 행복이다'라는 틀이 마음에 자리 잡게 되면 행복을 위해 더 노력하게끔 하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행복감이 느껴지지 않는 순간에는 내 인생은 기본도 안 되는 실패한 인생이라 판단되어 마음이

더 우울해진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그 틀의 내용을 쉽게 수정하거나 교체해 버리면 좋을 텐데 쉽지가 않다.

생각과 감정, 그리고 인생의 사건들과 뒤섞여 단단히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에 마음에 자리 잡고 있던 언어의 틀을 포기하는 것이 만만치 않다.


불행을 좇는 사람은 없다.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목표가 행복인 것과 행복감이 인생의 기본 감정인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살면서 제일 많이 느끼는 감정이 우울이라 한다. 잘못 살아서 우울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내용에 우울한 요소가

잔뜩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와 결혼에 이르지 못해도 우울하고 결혼은 했지만 결혼 생활이 생각과 다를 때도

우울하다. 자녀가 생기지 않을 때도 우울하지만 끔찍이 아끼는 자녀가 부모 마음대로 성장하지 않을 때도 우울하다.

늘어가는 주름에 우울하고 휙 지나가 버린 내 짧은 인생이 아까워 우울하다.

그래서 행복이란 단어가 범람하다 보니 슬며시 만들어진 '행복은 기본 감정이다'란 마음의 틀이,

우리 마음을 오히려 불행하게 만들기 쉽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포기는 없다'는 도전 정신으로 지금의 성공을 일궜다는 한 변호사 분이 최근 후배와 대화할 때 짜증을 많이 내는 것이

고민이라 한다. 소통이 나빠지니 일의 결과물도 좋지 않다고 한다. '포기는 없다'는 마음의 틀은 분명 성공에 도움을 주지만

마음의 에너지를 쥐어짜게 해서 마음을 쉽게 지치게도 한다. 마음이 지치면 공감 에너지가 고갈되면서 까칠한 언행이 나오기

쉽다. 분노 조절이 힘들다는 고민이 가득한 이유다. 그분께 '젊었을 때 하고픈 취미 없었냐'고 묻자 엉뚱하다는 표정으로

조금 당황하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고 답했다. 그래서 그림을 그려보라 권했다.


몇 달 후 다시 뵈었는데 표정이 환했다. 억지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행복감이 찾아와 이걸 왜

이제 시작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후배와 소통도 좋아졌다고 한다. 그리고 마음에 희한한 변화가 생겼는데

'성공이 뭐 그렇게 중요한가, 내가 가진 지식으로 도움드리며 적당히 벌고 삶을 즐겨야지'란 마음이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돈 적게 버느냐 질문했더니 더 번다고 한다. 소탈한 감성의 위력이다.

전에는 포기는 없고 꼭 성공해야 한다는 높은 기준으로 마음을 들들 볶았는데 그림 그리기로 마음을 위로해주니 기존의

마음의 틀이 자연스럽게 포기되고 삶의 기대치가 낮아지며 소탈한 마음이 주는 긍정성과 공감 감성이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이 긍정성과 공감이 성공의 핵심 요인이라는 것이 아이러니다.

마음을 비우니 행복과 보너스로 성공도 찾아온 셈이다.


우울증은 치료의 대상이지만, 일상에서 느끼는 우울한 감정은 행복의 적이 아니다.

우울마저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가슴에 가질 때 더 막강한 행복을 경험한다.

활짝 핀 벚꽃의 꽃말이 절세미인이라 한다. 미모를 잠시 뽐내고는 봄비에 모두 떨어져 버리는 벚꽃의 삶이 우리 인생을

닮아서인지 애잔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꽃잎이 난다, 사월이 간다, 나도 날아간다'라 부르는 가수 양희은씨의 노래

'4월'을 들으며 벚꽃이 주는 허전함에서 찾아오는 소탈한 감성을 느껴보시길 권해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