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역 육군 대장 박찬주 장군의 전역사(轉役辭)가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는 후배 장교들에게 간곡한 부탁을 남겼다. 정치 중립을 지키라, 정치인들이 평화를 외칠수록 군은 전쟁에 대비하라, 강력함을 매력으로 하는 군대가 돼 달라는 것 등이다. 당연한 말인데도 감동을 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 장군은 이런저런 혐의로 수사를 받으면서 대장 계급장을 단 군인으로서 큰 수모를 경험한 사람이다. ‘예포 발사도 의장대 사열도 없는’ 쓸쓸한 전역을 맞아야 했고, 전역사도 범죄 혐의를 벗은 후에야 쓸 수 있었다. 그의 전역사가 큰 감동을 주는 것은 ‘후배 장교에게 남긴 부탁’이라는 것이 실은 국군의 현실을 국민에게 고하는 고언(苦言)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국군은 여기저기 나사들이 풀어지면서 붕괴되고 있다. 이런 현상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세태의 변천으로 인한 현상들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가 군사 문제에 개입함으로써 빚어지는 것들이다. 세태의 변천이란 경제 성장, 전쟁 없는 시대의 지속, 출산율 저하, 군 복지 및 인권 개선 등 시대의 흐름과 함께 수반되는 군대 붕괴 현상들이다.
우선, 변화한 세태 속에서 병사들은 유약해지면서 강훈(强訓)이 사라지고 ‘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아 전역하는 숫자도 늘고 있다. 군 기강이 이완되면서 개인적인 이유에 의한 탈영, 총기 난사, 자살 등도 사라지지 않는다. 군 간부들도 ‘평범한 월급쟁이’가 되고 있다. 전쟁이 없는 시절이 이어지면서 군기가 문란해지고 진급·월급·연금 등에 연연하는 것은 어찌 보면 불가피한 일이며, ‘안보의 간성’이라는 사명감은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문민 통제에 대한 정치권의 몰이해와 이들의 군 개입으로 인한 폐해는 메가톤급이다. 북한이 공세적·침투적 대남 전략을 포기한 것도 아니고, 중국이 거대한 미래 위협으로 부상하는 중에 병 복무 기간을 18개월로 줄이는 것은 안보 논리에 안 맞다. ‘젊은 표심’을 노리는 정치 계산이 없다면 상상할 수 없다. 훈련 중 안전사고를 이유로 고위 지휘관들에게 과도한 책임을 묻거나, 비리 일소를 명분으로 ‘대어(大魚)잡이’ 또는 ‘망신주기’ 수사를 해 복지부동을 부추긴 사례도 적지 않다.
물론, 정치인은 북한과의 상생을 위해 ‘평화’를 화두로 삼을 수 있다. 그런데도 남북 상생과 안보는 병행돼야 한다. 즉, 정치인들은 평화를 외치더라도 군은 ‘위협에 대비하고 항상 훈련해 임전 태세를 유지한다’는 유비무환(有備無患)·백련천마(百鍊千磨)의 안보 정론을 지킬 수 있도록 보장해줘야 한다. 문민 통제란 그런 것이지만, 지금 국군에는 이 정론이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9·19 남북 군사분야 합의’가 국군을 무력화시킬 수 있음을 우려한다. 훈련을 안 하는 군대는 오합지졸이 되고 연합훈련이 없는 동맹은 고사(枯死)하는 법이다.
1975년 월맹군이 평화협정을 파기하고 남침했을 때, 남베트남군은 미군이 넘겨준 무기들을 버리고 달아났다. 영혼이 없는 군대에 돈·병력·장비 등은 무의미했다. 그래서 박 장군도 “군의 정치 개입도 안 되지만 정치인도 군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했다. 행간에서는 정치인들에게 ‘정치권력에 줄을 서는 군대로 만들지 말라’고 한다. “무능한 정권은 바꾸면 되지만 군대가 망하면 망국이 온다” “전쟁을 각오해야 전쟁을 막는다” 등은 고전적 진리지만, 이 순간 진실로 한국에 필요한 말들이다. 그것이 그의 전역사가 발하는 외침이다. 그래서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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