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1.10.21.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칼레의 시민(Les bourgeois de Calais)'은 유럽사의 가장 유명한 일화 중 하나다. 이 이야기는 프랑스의 거의 모든 역사책에 실려 있고, 특히 저명한 조각가 로댕이 1895년에 이를 소재로 걸작을 제작한 이후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백년전쟁 초기인 1347년 8월 4일, 유럽 대륙으로 건너와 공세를 펼치던 영국 국왕 에드워드 3세의 포위 공격에 맞서 1년 동안 강력하게 저항하던 칼레 시민들이 드디어 항복했다. 오랫동안 지속된 저항에 격노한 영국 국왕은 칼레 시민들을 전원 몰살하려 했다. 그의 부하들과 특히 필리파 왕비가 간곡히 설득하자 왕은 6명의 부자 시민들이 자원하여 사형을 당하면 나머지 시민들의 목숨을 구해주겠노라는 타협안을 내놓는다. 시장인 외스타슈 드 셍-피에르와 5명의 부유한 시민이 스스로 목숨을 희생하기로 하고, 왕이 말한 대로 목에 밧줄을 두르고 셔츠 바람에 맨발로 걸어 나왔다(로댕의 작품은 이 순간 그들이 겪는 죽음의 고뇌를 드라마틱하게 포착하고 있다). 이때 다시 왕비가 탄원하여 용감한 시민들의 목숨을 구해준다.
오랫동안 역사가들은 이 이야기의 사실성에 대해 의심해 왔다. 이미 18세기에 볼테르는 "원래 영국 국왕은 시민들의 목에 두른 밧줄을 세게 죌 생각은 없었을 것"이라고 추측한 바 있다. 최근 프랑스의 한 연구자는 이 이야기의 실제 의미가 왜곡·과장되었으며, 그것을 주도한 인물이 14세기의 연대기작가인 장 프루아사르(Jean Froissart)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칼레의 사건을 기록한 당대 문건들은 모두 20여 개가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시민들의 행위가 항복을 나타내는 연극적인 의식(儀式)이었다고 적고 있다. 말하자면 6명의 시민 대표들은 처음부터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지는 않았던 것이다. 원래 죄인이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는 의미로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행진하는 종교 의례가 있었는데, 칼레 시민들의 행위는 여기에서 발전해 나왔으리라는 점도 밝혀졌다. 애국적인 작가 프루아사르만이 이 사건을 숭고한 행위로 미화하며 민족 정서에 호소하였던 것이다.
16세기 이후 이 사건이 다시 알려지면서 프루아사르식의 해석이 대중의 감성을 지배했다. 특히 민족주의의 시대인 19세기에 역사학 교과서들이 칼레의 시민을 외세에 저항하며 동료 시민들의 목숨을 구하고자 한 애국적인 영웅으로 크게 부각시켰고, 문학과 예술이 그것을 뒷받침했다. 몰랐던 진실을 새로 알게 되는 희열보다도 또 하나의 아름다운 신화가 깨졌다는 아쉬움이 더 크다.
(내용을 보충하기 위해 추가한 이미지)
삼성_플라토미술관(Plateau Gallery)-깔레의 시민들. 로댕
1884년 칼레시는 조각가 로뎅에게 조각상을 의뢰했고
10년 간 심혈을 기울여 1895년 청동으로 된 <칼레의 시민>이 완성되었다.
그 후 이 조각상은 복제되어 12개국에 보내졌고,
그 중 하나가 우리나라 삼성본관 옆 “로뎅의 거리”에 전시되어 있다.
(사진 - 2012.06.21.플라토미술관에서)
시민 개인의 표정
(공공 선을 위한 헌신)고다이버 부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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