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일본 동북대지진 참사를 지켜보며 자연의 무심한 용틀임 앞에 우리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하찮은가 뼈저리게 느꼈다. 하지만 엄청난 자연재해의 순간에도 침착함과 배려심을 잃지 않는 일본인들의 행동에서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보았다. 생필품을 사려는 사람들이나 기름을 넣으려 늘어선 자동차의 행렬에 새치기도 없고 당장 필요한 분량 이상을 거머쥐려 떼를 쓰지도 않는 걸 보며 일본인들의 질서정연함이 무릇 개미의 사회성을 능가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일본인들은 평소에도 남에게 폐를 끼치는 걸 거의 병적으로 혐오한다. 그래서 비록 집안은 그야말로 굴 속 같을망정 거리에는 쓰레기 한 톨 남기지 않는다. 지하철을 타기 전에 아이들에게 미리 용변을 보게 하며, 차 안에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신문도 A4용지 크기로 접어서 본다. 그들이 10년 넘도록 우리 이수현씨를 기리는 것도 어찌 보면 일본인 주정뱅이가 이수현씨와 그의 가족에게 끼친 폐의 흔적을 지우려는 결벽의 표현일지 모른다. 당시 이수현씨와 함께 구조작업을 하다 죽은 일본인 사진작가 세키네 시로에 대한 추모와는 사뭇 다르다. 일본인들에게 그는 '남'이 아닌 모양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어떤가? 남에게 폐가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밀어붙이기 일쑤고 때로는 폐가 되고 있음을 지적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쩨쩨하다며 들이댄다. 공공장소가 자기 집 거실인 양 떠들며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말릴 생각조차 하지 않는 부모들, 무리한 끼어들기로 경적 소리가 끊이지 않는 도시의 찻길, 그저 폐를 끼치는 수준을 넘어 멀쩡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기도 하는 인터넷 댓글의 무례함과 잔인함….
민폐 행위의 증가는 사회의 익명화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구성원 모두가 각자의 존재를 확실하게 아는 작은 사회에서는 대놓고 남에게 폐를 끼치기 어렵다. 그렇다면 혹시 섬이라는 폐쇄적 공간의 생태적 속성이 그곳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만든 것은 아닐까? 영국, 뉴질랜드, 마다가스카르 사람들도 일본 사람들 못지않은지 궁금하다. 영국인과 유럽 대륙인 그리고 마다가스카르 사람들과 아프리카 대륙에 사는 사람들의 민폐 행태를 비교하는 연구를 해보고 싶은데, 너무 많은 사람에게 폐가 되려나?
(출처-조선일보 2011.03.21 .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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