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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104] 매뉴얼 사회

바람아님 2013. 12. 21. 10:04


(출처-조선일보 2011.03.28.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당신은 가전제품을 구입했을 때 사용설명서를 읽습니까?"라는 심리테스트 질문이 있다. 우리 중에는 분명히 전원을 연결하기 전에 그 깨알 같은 사용설명서를 꼼꼼히 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것 읽기를 죽어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밝히기 좀 주저되지만 나도 후자에 속한다. 아내는 늘 내게 무슨 과학자가 그렇게 주먹구구냐고 나무란다. 아, 그런데 정말 싫은 걸 어쩌랴.

이번 동북대지진 사태에서 드러난 일본 시민들의 질서정연함은 실로 감탄을 자아내지만, 반대로 일본 정부의 경직된 대응은 엄청난 비난에 휩싸였다. 제대로 된 매뉴얼도 별로 없고 그나마 있는 것도 정작 위기 상황에서는 활용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이는 우리 사회는 사실 가타부타할 자격도 없다. 하지만 지나치게 매뉴얼에 의존하여 오히려 피해 규모를 키운 듯한 일본 정부의 체제에도 분명히 문제가 있어 보인다.

개미사회는 여왕개미를 비롯하여 수많은 일개미가 모두 독립적인 생명을 유지하는 개체들이지만 마치 큰 동물의 몸을 이루는 세포들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인다고 하여 흔히 '초유기체(superorganism)'라고 부른다. 초유기체의 작업 효율을 높이기 위해 어떤 개미사회에서는 아예 태어날 때부터 몸의 크기와 구조가 다른 여러 일개미 계급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각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오로지 한 가지 일만 계속한다. 그런가 하면 다른 개미사회들은 몸의 크기와 구조가 동일한 단일 계급의 일개미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 사회의 일개미들은 처음에는 여왕 주변에서 잔심부름하다가 나이가 들면 점차 다른 '부서'로 이동하며 다양한 직업에 종사한다.


세계적인 개미학자 하버드대학의 윌슨(Edward Wilson) 교수는 이 두 종류의 개미들을 비교하며 흥미로운 실험을 수행했다. 천재지변 수준의 사고를 일으켜 그들의 체제를 망가뜨려 보았더니 평소에는 최고의 효율을 자랑하던 다계급 개미사회는 자체적인 경직성 때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데, 언뜻 단순해 보이는 단일계급 사회에서는 온갖 다양한 직종의 일개미들이 한꺼번에 사건 현장으로 몰려들어 문제를 해결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거의 1만 종의 개미 중 95% 이상이 단일계급 사회로 진화했다. 매뉴얼과 더불어 융통성을 추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