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4.24 03:17
3·1운동 후 일제 타협을 기만적 술책이라고 한다
기만을 극복하고 성장한 인재가 오늘을 만들었다
이병철도, 정주영도 3·1운동이 만든 영웅이다
정주영 자서전을 읽다가 웃음이 나온 것은 그가 가출을 결심했을 때 대목이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청진에 가자. 같은 쥐라도 뒷간에 있던 쥐는 × 먹다 도망가고, 광에 있던 쥐는 쌀 먹다 도망간다고 했는데!" 그가 살던 동네에서 유일하게 구장 댁만 신문을 구독했다. 정주영은 매일 구장 댁에 가 어른이 돌려 읽은 신문을 얻어 읽었다. 어느 날 '청진에서 항구와 제철소 공사가 시작돼 일손이 부족하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가 소년 정주영의 가슴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처지는 달랐지만 이병철 자서전에도 소년 시절 인생이 바뀌는 대목이 나온다. 이병철이 유교적 질서가 굳건한 고향에서 서당을 벗어난 건 11세 때였다. 그의 표현을 옮기면 '긴 머리를 싹둑 잘라버리고' 경남 진주의 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병철은 이날이 '나의 개화(開化)의 날'이라고 자서전에 썼다. 가출을 결행한 소년 정주영이 결국 서울까지 진출했듯, 진주에 진출한 소년 이병철도 여세를 몰아 경성에 입성한 뒤 다시 한 번 여세를 몰아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두 소년의 모험담에는 '근대(近代)'가 등장한다. 먼저 신문이다. 정주영이 구장 댁에서 얻어 읽은 건 동아일보였다. 너무 몰두한 나머지 신문에 연재하던 이광수의 농촌계몽 소설 '흙'을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기사로 착각했다. 비록 낙방했지만 주인공 허숭 변호사를 인생의 본보기로 삼아 육법전서를 외우고 고시에도 응시했다. 동아일보는 1920년 조선일보에 이어 창간한 한글 신문이다. 신문의 우리말 소설과 기사가 오늘의 정주영을 만들었다.
이들이 만난 두 번째 '근대'는 학교다. 보통학교는 지금 초등학교에 해당하지만 당시엔 전통 교육에서 근대 교육으로 전환하는 첫 관문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이병철이 입학한 1921년 15만명이던 보통학교 조선인 학생은 1943년 277만명으로 늘었다. 당시 조선을 휩쓸던 사조(思潮)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자조론(自助論)이었다. 숫자는 열망의 강도를 말해준다. 이병철은 자신이 독립시킨 머슴의 자녀도 좋은 학교를 나와 훗날 삼성에 입사했다고 술회했다.
이 시기 식민지 조선의 학교 체계는 크게 변했다. 1926년 교육의 정점에 경성제국대학이 세워지면서 '초등(보통학교)→중등(고등보통학교)→고등(전문학교·예과)→대학'으로 이어지는 근대 교육 체계가 완비됐기 때문이다. 교육 열풍이 불면서 관립 경성제2(훗날 경복)·광주(광주제일)·춘천·청주·진주고보가 문을 연 것도 1920년대였다. 이 학교들은 이 시기 일류 학교의 전통을 이어받아 해방 이후에도 한국 엘리트의 산실로 기능을 이어갔다.
이들이 만난 세 번째 '근대'는 산업이다. 청진을 향해 가출한 정주영이 철도 공사장에서 중노동을 하고 받은 품삯은 45전이었다. 숙식비를 떼고 나면 15전만 남았다고 한다. 정주영은 "내 힘으로 돈을 벌어본 나는 내버려만 두면 얼마든지 새로운 세계를 개척할 자신이 있었다"고 했다. 당시 세계는 1차 대전 종전과 함께 산업화 열풍이 불었다. 서울에 진출한 정주영은 쌀가게로 시작해 1940년 자동차 수리업체를 인수하면서 초기 자본을 축적했다. 이병철이 세운 삼성상회는 삼성그룹의 모태가 됐다. 흔히 '일제강점기의 노예적 시대'로 기억되는 1930년대 일이다.
이병철과 정주영은 각각 1910, 1915년 태어났다. 그들을 '3·1운동 키즈'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3·1운동이 선물한 문명과 제도의 혜택을 온몸으로 받은 세대이기 때문이다.
3·1운동은 일제에 큰 충격을 던졌다. 당시 일본 지식인의 저술엔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해선 타협할 수밖에 없다는 초조감이 드러나 있다. 충분치는 않으나 3·1운동은 식민지 차별 정책을 바로잡아 조선인에게 근대적 성장과 성공의 가능성을 열어줬다. 소년 정주영을 세상의 중심에 서게 한 한글 신문, 소년 이병철에게 개화의 기쁨을 선물한 교육 체계, 두 사람 모두에게 자본 축적의 기회를 준 회사 제도는 3·1운동이 한민족에게 준 결실이었다.
역사학자들은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타협을 '기만적 술책'이라고 한다. 그렇다. 하지만 기만을 실력과 뚝심으로 극복하고 성장한 수많은 인재가 1960~70년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3·1운동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숨은 영웅 발굴한다며 엉뚱한 진영에서 헤매지 말고 3·1운동에서 출발한 대한민국 기적의 역사부터 재평가했으면 한다.
처지는 달랐지만 이병철 자서전에도 소년 시절 인생이 바뀌는 대목이 나온다. 이병철이 유교적 질서가 굳건한 고향에서 서당을 벗어난 건 11세 때였다. 그의 표현을 옮기면 '긴 머리를 싹둑 잘라버리고' 경남 진주의 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병철은 이날이 '나의 개화(開化)의 날'이라고 자서전에 썼다. 가출을 결행한 소년 정주영이 결국 서울까지 진출했듯, 진주에 진출한 소년 이병철도 여세를 몰아 경성에 입성한 뒤 다시 한 번 여세를 몰아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두 소년의 모험담에는 '근대(近代)'가 등장한다. 먼저 신문이다. 정주영이 구장 댁에서 얻어 읽은 건 동아일보였다. 너무 몰두한 나머지 신문에 연재하던 이광수의 농촌계몽 소설 '흙'을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기사로 착각했다. 비록 낙방했지만 주인공 허숭 변호사를 인생의 본보기로 삼아 육법전서를 외우고 고시에도 응시했다. 동아일보는 1920년 조선일보에 이어 창간한 한글 신문이다. 신문의 우리말 소설과 기사가 오늘의 정주영을 만들었다.
이들이 만난 두 번째 '근대'는 학교다. 보통학교는 지금 초등학교에 해당하지만 당시엔 전통 교육에서 근대 교육으로 전환하는 첫 관문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이병철이 입학한 1921년 15만명이던 보통학교 조선인 학생은 1943년 277만명으로 늘었다. 당시 조선을 휩쓸던 사조(思潮)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자조론(自助論)이었다. 숫자는 열망의 강도를 말해준다. 이병철은 자신이 독립시킨 머슴의 자녀도 좋은 학교를 나와 훗날 삼성에 입사했다고 술회했다.
이 시기 식민지 조선의 학교 체계는 크게 변했다. 1926년 교육의 정점에 경성제국대학이 세워지면서 '초등(보통학교)→중등(고등보통학교)→고등(전문학교·예과)→대학'으로 이어지는 근대 교육 체계가 완비됐기 때문이다. 교육 열풍이 불면서 관립 경성제2(훗날 경복)·광주(광주제일)·춘천·청주·진주고보가 문을 연 것도 1920년대였다. 이 학교들은 이 시기 일류 학교의 전통을 이어받아 해방 이후에도 한국 엘리트의 산실로 기능을 이어갔다.
이들이 만난 세 번째 '근대'는 산업이다. 청진을 향해 가출한 정주영이 철도 공사장에서 중노동을 하고 받은 품삯은 45전이었다. 숙식비를 떼고 나면 15전만 남았다고 한다. 정주영은 "내 힘으로 돈을 벌어본 나는 내버려만 두면 얼마든지 새로운 세계를 개척할 자신이 있었다"고 했다. 당시 세계는 1차 대전 종전과 함께 산업화 열풍이 불었다. 서울에 진출한 정주영은 쌀가게로 시작해 1940년 자동차 수리업체를 인수하면서 초기 자본을 축적했다. 이병철이 세운 삼성상회는 삼성그룹의 모태가 됐다. 흔히 '일제강점기의 노예적 시대'로 기억되는 1930년대 일이다.
이병철과 정주영은 각각 1910, 1915년 태어났다. 그들을 '3·1운동 키즈'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3·1운동이 선물한 문명과 제도의 혜택을 온몸으로 받은 세대이기 때문이다.
3·1운동은 일제에 큰 충격을 던졌다. 당시 일본 지식인의 저술엔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해선 타협할 수밖에 없다는 초조감이 드러나 있다. 충분치는 않으나 3·1운동은 식민지 차별 정책을 바로잡아 조선인에게 근대적 성장과 성공의 가능성을 열어줬다. 소년 정주영을 세상의 중심에 서게 한 한글 신문, 소년 이병철에게 개화의 기쁨을 선물한 교육 체계, 두 사람 모두에게 자본 축적의 기회를 준 회사 제도는 3·1운동이 한민족에게 준 결실이었다.
역사학자들은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타협을 '기만적 술책'이라고 한다. 그렇다. 하지만 기만을 실력과 뚝심으로 극복하고 성장한 수많은 인재가 1960~70년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3·1운동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숨은 영웅 발굴한다며 엉뚱한 진영에서 헤매지 말고 3·1운동에서 출발한 대한민국 기적의 역사부터 재평가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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