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3.13. 03:17
세상은 제재를 말하는데 정권은 협력을 말한다
잘못에 잘못을 더한다.. 의도적이다
작년 3월 7일 자(字) 이 코너에 '잘못된 보고가 나라를 그르쳤다'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글을 쓴 6일은 대북 특사단이 돌아와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했다"고 발표한 날이다. 처음엔 '최악의 특사단'이란 제목을 붙였는데 "지나치다"는 선배 조언에 따라 고쳤다. 대북 특사단을 그렇게 말한 건 아니다. "일본에서 전쟁의 정세를 보지 못했다"고 보고해 국란을 키운 임진왜란 직전 대일 통신사를 가리켰다. 대북 특사단도 428년 전 통신사처럼 잘못된 보고로 나라를 망치는 '실보오국(失報誤國)'의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는 취지였다.
이후 세상은 특사단이 깔아놓은 융단 위에서 움직이는 듯했다. 겨울이 봄으로 변했다. "당신이야말로 현실을 잘못 읽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북한이 변한다는데 부정하는 근거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학자들은 북한이 말했다는 비핵화가 예전엔 주한 미군 철수였고 지금은 핵 동결을 뜻한다고 처음부터 지적했다. 남북이 정의하는 비핵화 문맥이 다르다는 것이다. 특사단은 차이가 없다고 했다. 하노이 미·북 회담에서 안개가 걷힐 때까지 대북 특사단의 '실보(失報)'에 나라가 휘둘렸다고 생각한다.
각도가 전혀 다른 반응도 접했다. 학봉(鶴峰) 김성일 선생의 후손이 보낸 장문 편지였다. 학봉은 "일본에서 전쟁의 정세를 보지 못했다"고 보고한 통신사였다. 대일 통신사 일행 중 그렇게 말한 이는 그뿐이었다. 후손이 보낸 편지 요지는 이랬다. 학봉 선생은 못 본 것을 못 봤다고 진실을 고했고, 진실을 고한 것은 동요하는 민심을 진정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후손 처지를 반영해 글을 고치면서 생각했다. 대북 특사단도 민심을 진정하기 위해 들은 것을 들은 대로 전했을 뿐 아닐까. 외교관의 지혜가 얼마나 중요한지 느꼈다.
후손의 편지를 계기로 학봉을 공부하면서 기회가 있으면 쓰고 싶은 이야기가 생겼다. 최악의 특사단, 그 후 이야기다.
학봉이 고한 적정(敵情) 보고를 수용하느냐 하는 판단은 임금 몫이었다. 그런데 전쟁이 터지자 임금은 학봉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워 파직하고 국문하려고 했다. 그러다 가까스로 구제돼 경상도 초유사(招諭使·난리 때 백성을 결집하는 관직) 임명을 받은 학봉이 당시 임금에게 올린 보고서가 전해진다. '신은 만 번 죽어도 마땅한데 특별히 천지 같은 재생의 은혜를 입어… 명을 받고 감격하여 하늘을 우러러 눈물을 흘리면서 왜적들과 함께 살지 않기로 맹세하였습니다.' 그가 쓴 '臣罪當萬死(신죄당만사)'란 한문이 비장하다. 학봉은 격정적 초유문과 포용적 지도력으로 관군과 의병을 하나로 결집해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 전투는 이순신의 해전과 함께 영남 일부와 호남 전부를 사수한 대표적 승전으로 꼽힌다. 학봉은 승전 직후 전장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공(功)은 과(過)의 수십 배다. 학문적 공까지 합치면 수백 배에 이른다.
당시 조선은 무능했지만 책임감이 있었다. 지금은 무능한 데다 뻔뻔스럽다. 이런 세태를 상징하는 인물이 통일부 장관까지 지냈다는 정세현씨다. 2002년 북한이 노골적으로 핵을 개발할 때 그는 통일부 장관 신분으로 "북핵은 남(南) 공격용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공격용이니 안심하자'는 말과 다름없다. 북핵을 두둔하고 동맹을 해쳤다. 학봉의 자세를 생각하면 그토록 두둔하던 북한이 핵실험을 할 때 풍계리에서 풍찬노숙하면서 몸으로 막았어도 충분치 않다. 북한이 연평도에 대포를 날릴 때 몸으로 포탄을 받겠다며 달려가고, 천안함이 폭침당했을 때 장병을 구하겠다며 먼저 바다에 몸을 던져야 했다. 그것이 인간의 책임감이다. 그런 인물이 지금껏 살아남아 미국 협상단을 향해 "인디언을 죽이는 백인 기병대장" "재수 없는 사람" 운운하며 북한을 두둔하고 동맹을 때린다. 이 정권 주변 인물의 처세법이 대개 이렇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는 정말 심하다.
특사단과 대통령에게 '신죄당만사'를 외치는 것은 아니다. 반성이 필요하다고 말해야 듣지도 않을 것이다. 문제는 지금 정권이 무슨 이유인지 '실보'에 '실보'를 더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은 북한이 말하는 비핵화를 비핵화가 아니라고 하는데 대통령은 국민에게 계속 비핵화라고 한다. 세상은 대북 제재를 이야기하는데 대통령은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재개를 말한다. 눈앞의 개를 두고 양이라고 한다. 정권 주변의 나팔수들도 양이라고 한다.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이다. 언젠가 그 내막이 밝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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