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초적 인간은 자신과 자신의 가까운 주변 밖에 살필 줄 모른다. 그런 인간들이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자신의 이익과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서로가 서로의 생명과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는 도덕률 및 그에 뿌리를 둔 법을 지키며 사회에 편입된다. 이는 인간의 역사를 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은 전쟁, 살인, 약탈 등은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핵심 단어들이다. 오늘은 힘의 우위로 전쟁과 약탈에서 성공한 개인이나 집단도 내일은 거꾸로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서 해방되지 못한다. 인간들은 이런 공포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질서를 세워왔다. 세상이 문명화됨에 따라 질서의 바탕이 되는 도덕률과 법도 다듬어지면서 대체로 평화로운 세상이 이룩됐다. 높은 도덕률과 법을 지키는 정신은 인간을 고결하고 품위 있는 존재로 만들었다.
그래서 과거는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들이 돌아보고 지혜를 얻을 수 있는 보고(寶庫)이다. 거기에는 물론 살려야 할 것도 있고 고쳐야 할 것도 있다. 고쳐야 할 것들은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없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규율을 말하는데, 이는 곧 꽤 잘 다듬어진 인간성에도 어긋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 규율들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점점 사라지는 경향을 보이는데, 시간의 흐름이 중요한 이유는 그런 규율의 사회 적합성 여부는 한 두 명의 판단에 의존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축적된 지혜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더디게 변하는 경향을 보인다. 인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을 추구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게 느껴진다.
인간의 역사는 단절하거나 단번에 바꿀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비록 혁명의 당위성이 축적되었지만, 일거에 과거를 뒤집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했던 프랑스 혁명을 비롯한 모든 혁명은 실패했다는 평가가 온당하다. 인간의 지혜가 녹아있는 과거와의 단절을 꾀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과거를 바탕으로 미래로 가는 과정이며, 돌연변이가 나타나 퇴행시키지 않는 한, 인간의 역사는 서서히 진보하는 경향을 지닌다.
지금 대한민국은 과거에 쌓인, 이른바 적폐 청산에 매몰돼있다. 과거를 완전히 지우고 새로운 역사를 쓴다는 발상은 인간 세상에 대한 이해가 없거나 부족한 소치에서 연유한다. 그러니 현 정권이 인간과 국가에 관한 올바른 철학을 가지기 어려운 것도 당연하다. 고쳐야 할 것은 가급적 빠른 시간 안에 고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된 것들 중에는 적폐라는 것이 별로 없다. 이미 퇴출 과정을 거쳤고, 정부나 정치권의 방해가 없다면 퇴출 메카니즘이 지속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청산해야 할 적폐는 오히려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것들 중에 많다.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의견을 무시하고 특정 세력의 이념이나 가치를 반영한 것들이다. 모두를 바보로 만드는 교육평준화, 획일적 인간을 만들어내는 국가주도 입시제도,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위협하는 다락같이 높은 세금, 기업의 자유를 억압하는 제반 법률들, 기업과 산업을 황폐화하는 일부 강성 노동조합, 다수에 대한 소수의 착취구조 및 소수에 대한 다수의 착취구조 등이 그런 것들이다.
역사를 빛낸다는 개념은 과거에 축적된 지혜를 바탕으로 더 풍요롭고 평화로운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어야 한다. 불완전한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무결점의 세상이 아니다. 또 불완전과 결함은 문명의 진보와 함께 서서히 줄어드는 것이지 일거에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연히 그런 진행을 가속화하는 정부정책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올바른 정책이라는 것 역시 시간의 흐름과 함께 판단되는 것이다.
인간들의 지혜로운 행동 규칙이 녹아있는 도덕과 이를 지탱하는 정의감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분노와 결기에 의한 적폐청산과 존재할 수 없는 무결점 사회를 꿈꾸는 것은 의도와는 다르게 대한민국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로 만들 것이다.
김영용 전남대 명예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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