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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와 시각>대통령이 해서는 안 될 말

바람아님 2019. 5. 29. 00:04
문화일보 2019.05.28. 12:10


무릇 정치는 말의 기술이다. 일국의 지도자에게는 해야 할 말이 있고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다. 더구나 국가 최고 통치자라면 할 말과 안 할 말을 가릴 정도의 분별력은 가져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사에서 “독재자의 후예가 아니라면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르게 볼 수 없다”고 한 말을 들으며 귀를 의심했다. 누가 봐도 기념식장에 함께 있던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한국당의 전신을 이끌었던 과거 인물들이 독재를 했다는 것인지, 황 대표의 조상이 독재자였다는 것인지, 그래서 그 후예가 연좌제 적용이라도 받아야 한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섬뜩했던 건 ‘독재자의 후예’ 그 말 속에 감춰진 비수다. 반대자들에 대한 분노, ‘보수 대청소’를 향한 성전의 기운이 느껴졌다.


문제의 본질은 한국당과 황 대표가 독재자의 후예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데 있지 않다. 대통령이 해서는 안 될 말, 즉 ‘국민 분열의 언어’를 쏟아내고 있다는 게 큰 문제다. 여야 정치권은 종종 당파적으로 행동할 수도 있고 극단적인 말싸움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통령은 그래서는 안 된다. 특정 진영의 입장에서 반대자들에게 자극적인 언어를 쏟아내는 것은 대통령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문 대통령은 집권 직전 출간했던 문답집 ‘대한민국이 묻는다’(2017)에서 ‘대통령이 꼭 지켜야 할 세 가지’로 경제와 안보, 그리고 ‘통합’을 꼽았다.(257쪽) 그때는 그랬는데, 집권하고 나니 생각이 달라진 건가. 청와대 참모들이 설령 원고 준비 과정에서 야당을 겨냥해 모진 표현을 넣었다 하더라도 국민통합이라는 대의를 생각하는 지도자라면 삼갔어야 했다.


5·18 행사 당일 시민단체의 격렬한 저항과 물벼락을 뚫고 어렵게 식장에 온 황 대표를 겨냥한 ‘독재자의 후예’ 발언은 저주에 가까웠다. 저주는 또 다른 저주를 부른다. 황 대표는 사흘 뒤 “진짜 독재자의 후예에게는 말 한마디 못하니까 ‘(김정은) 대변인’ 소리가 나오는 것”이라고 맞받았다. 청와대의 반박이 뒤따랐고 다시 한국당은 ‘남로당의 후예’ 공세를 퍼부었다. 받은 만큼 돌려주는 저주의 오마주가 반복됐다. 여야 정치권이 자극적인 언어로 거친 공방을 주고받는 건 한국 정치의 고질병이 된 지 오래다. 상대를 타협의 대상이 아닌 타도의 대상으로 삼아 지지층을 결집하려는 의도가 빚어낸 정치문화다. 비극적인 건 대통령이 바로 그 ‘증오 기반’ 정치문화의 한가운데에 서 있고, 그걸 진두지휘하는 기막힌 현실에 대한민국이 놓여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은 단순히 한 정파의 대표가 아니라 국가의 대표이고 국민의 대표이다. 자신에 대한 지지자는 물론 반대자까지 포용하고 통합하는 게 그의 숙명이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의 언어는 정치권의 거친 공방과는 구분되는 ‘격’을 가져야 한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아방(我方)과 타방(他方)을 분리하고 야당을 몰아세우는 것은 대통령이라는 직책이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인 ‘국민통합’을 부정하는 행위다. 경제가 힘들어지고 안보도 불투명한 상황에서 국민을 분열과 갈등으로 내모는 대통령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이 다시 묻고 있다. 문 대통령이 진정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minsk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