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수 조사팀장
사물의 명칭은 존재의 본질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제대로 된 명칭이 붙여져야 사물은 비로소 존재 가치를 지니게 된다. 역으로 명칭이 사물의 성격을 규정하기도 한다. 논어 자로편(子路篇) 3장을 보면 2500년 전 공자도 올바른 이름 사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제자 자로에게서 ‘정치를 한다면 무엇부터 먼저 하시겠느냐’는 질문을 받자 공자는 ‘반드시 이름을 바로 잡겠다(必正名)’고 대답했다. ‘이름에 실체가 따르지 않으면, 말에 무리가 있어 남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정치의 경우에 실효를 거둘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른바 정명론(正名論)이다. 프랑스의 소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도 하나의 사물을 가장 정확히 표현하는 단어는 하나밖에 없다는 일물일어(一物一語) 설을 주장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6·25전쟁’은 거론하지 않고 ‘한국전쟁’을 딱 한 번 사용했다. 정부의 6·25 공식 명칭은 ‘6·25전쟁’이다. 6·25전쟁을 지칭하는 용어는 1969년부터 지금까지 여섯 차례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많은 논란을 불러왔다. 그 과정에서 동란→ 사변→ 남침→ 전쟁으로 바뀌었다. 중고교생들이 2020년부터 배울 새 국사 교과서 집필 기준 시안에는 ‘북한 정권의 전면적 남침으로 발발한 6·25전쟁’이란 표현이 포함됐다. 앞서 1994년 교육부가 발표한 국사 교과서 개편 시안에서도 영문 번역을 감안해 ‘한국전쟁’(Korean War)으로 수정하자는 안이 제기됐으나 정치적으로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지적에 따라 6·25전쟁이란 용어를 존속시켰다. 대한민국 현행 법령집에도 6·25전쟁은 있지만, 한국전쟁은 없다. 한국전쟁은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됐다는 책임이 희석된 표현이다. 세계 어느 나라도, 설령 내전이라 할지라도 자국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스스로 전쟁 당사자가 아닌 제3자임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남북전쟁이라고 하는 이유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현충일 추념사에서도 6·25전쟁 대신 한국전쟁이라고 했다. 여러 오해를 자초한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용어일수록 대통령부터 정부의 공식 명칭을 정확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것이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영령들을 기리고, 그들의 희생정신을 헛되지 않게 하는 첫 단추다. 굳이 한국전쟁이라고 부르고 싶다면, 국민 앞에 소상히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는 것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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