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일은 전쟁 불구 최고의 同盟
인도·태평양 중시, 韓 배제 우려
文대통령도 국익 우선 외교해야
지난주 오키나와(沖繩)를 방문했다. 일본의 대표적인 휴양지지만 역사적으로도 유서가 깊은 곳이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미국 주도의 연합군과 일본군이 최후의 사투를 벌인 곳으로, 1945년 4월 1일부터 6월 22일까지 83일간의 전투에서 적어도 16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섬 남쪽에는 태평양을 바라보며 세워진 거대한 평화기념관이 있는데, 이곳에는 일본군뿐 아니라 연합군 전사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고, 한국인 위령탑도 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오키나와에서 사실상 막을 내린다. 오키나와 전투를 경험한 미국이 일본 본토 상륙 작전보다 원자폭탄 투하가 더 희생을 줄일 것이란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전쟁의 참극이 벌어진 하와이와 오키나와 두 곳 모두 대표적인 휴양지라는 사실이 역설로 다가왔다.
오키나와의 태평양전쟁 관련 기념물은 한·일 관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엄청난 살상을 주고받았던 미국과 일본이 지금은 최고의 동맹 관계를 누리는 걸 보면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으며 국익만이 있다’는 국제정치의 철칙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현재의 한·일 관계를 보면 과연 국익이 우선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불행한 과거를 잊어선 안 된다는 점을 부정할 사람은 없겠지만, 과거에 매몰돼 지정학적 변화의 소용돌이를 간과하다간 오히려 역사적 실패를 되풀이하는 우를 범하고 말 것이다.
국제사회에서는 새로운 지정학적 논쟁이 한창인데, 한국은 북한 문제를 빼면 이상하리만큼 조용하다. 미국에선 인도·태평양이 새 담론으로 떠오르고 있고, 하와이 진주만에 있는 아시아·태평양사령부의 이름도 이미 인도·태평양사령부로 바뀌었다. 특히, 한국이 인도·태평양에 포함되는지를 놓고 워싱턴에선 여러 논쟁이 있지만, 당사자인 한국은 오히려 조용하다. 한·미·일 삼각 공조를 강조하는 미국 내 목소리는 현저히 줄어들었고, 한·일 과거사 분쟁을 조정하려던 노력도 이젠 찾아보기 힘들다.
미국의 셰일 혁명으로 중동 원유의 중요성이 줄어들면서 미국은 아시아 지역에서 ‘경찰’ 역할을 점차 줄여가려고 한다. 여기엔 주한 미군 감축도 검토 대상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연임하면 이런 흐름은 더욱 빨라질 것이다. 대통령이 바뀌어도 큰 흐름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더구나 중국은 아시아에서의 영향력 확대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이 아직 미국에 버금가는 ‘글로벌 파워’는 아니지만, 아시아의 ‘지역 파워’로서의 위치는 굳혀가고 있다. 일대일로 프로젝트는 중국몽 실현을 위한 프레임이고,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은 실행 기구다. 이미 사드, 화웨이 문제 등으로 한국을 겁박하는 등 주변국에 거친 행동도 서슴지 않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급변하는 지정학적 상황에 걸맞은 큰 그림을 갖고 미래지향적 외교를 펼쳐야 한다. 첫걸음은 심각하게 일그러진 한·일 관계 복원이다. 일본은 한국과 가장 많은 전략적 공유지를 가진 나라다. 미국의 동맹인 일본은 중국의 부상과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에 꼭 필요한 나라다. 일본은 아시아의 대표적인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데다, 저출산·고령화라는 사회적 도전도 한국보다 먼저 겪고 있어 함께 고민하고 논의할 사안이 많다. 과거에는 한·일 간 갈등이 생기면 막후 조정 역할을 했던 비공식적 라인들이 제법 있었지만 이젠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시대가 바뀐 만큼 과거보단 투명하고 공식적인 대화, 솔직한 전략 대화를 할 때가 되긴 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만 해도 한국인들은 싫어하지만, 1945년 이후 최장수 총리를 할 만큼 지도력을 인정받고 있는 만큼 파트너로서 존중해야 한다.
한·일 관계의 큰 획은 1965년 관계 정상화와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이다. 특히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전임 김영삼 정부가 총독부 건물을 해체하는 등 대대적인 반일 캠페인을 벌이면서 한·일 관계가 최악의 상황을 맞은 뒤 이뤄졌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대중 정부는
첫째, 임진왜란 7년과 식민지 지배 36년을 제외하곤 한·일 관계가 비교적 양호했다는 역사인식,
둘째,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미국과의 동맹 등 양국이 공유하는 보편적 가치에 대한 강조,
셋째, 실질적인 국익을 잣대로 대일 정책을 펼쳤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 햇볕정책 계승자임을 자임하는 문 정부가 대일 관계에서도 그런 원칙과 정신을 이어갈 수는 없을까.
최후의 사투를 벌였던 전쟁터가 휴가 온 젊은 부부들로 북적이는 휴양지로 변신한 오키나와처럼 한·일 관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를 기대한다. 다음 주 오사카(大阪)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이번 만남을 새로운 시작의 비전을 공유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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