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민의 직격인터뷰] "남북 공존 주장하면서 왜 남남갈등 심한지 이해 안돼"
중앙일보 2019.07.12. 00:03
정치가 국제정세 못보고 단합 못해
일본 수출 규제는 신속대응 촉구성
한국, 무대응하면 더 확대될 것
‘한반도 분단의 기원’ 펴내는 오코노기 마사오 교수
그가 은퇴 후 5년여 만에 『한반도 분단의 기원』(나남출판)을 출판한다. “한반도 분단의 원인을 정리하는 것은 학자로서의 오랜 고민이고 과제였다”는 그는 “한반도 분단은 일본 현대사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는 면에서 분단의 무대를 설정한 게 일본이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집필 동기를 설명했다.
내용은 이렇다.
① 분단은 미·소 냉전체제가 만들어낸 국제 정치의 산물이었기 때문에 불가피했다.
② 따라서 독립운동이나 해방 후 국내 정치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③ 당시 정치인들이 이런 정세와 상황을 파악하고 내부적으로 단합하는 지혜를 발휘했어야 했는데 오히려 대립은 너무 심했다. ④ 미·소 냉전이 끝났을 때 (1990년대) 분단 체제를 종식시킬 수 있는 기회를 이용하지 못하면서 한편으론 국제적인 지역 분쟁의 원천이 되고 있고, 국내적으로는 진영 대결과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오코노기 교수는 “한국인들은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을 곧바로 독립국가 건설로 받아들였을 뿐, 해방과 분단의 이면에 작용한 미·소 냉전이라는 국제 정세와 세계적인 흐름을 보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북한 비핵화와 평화 체제를 위한 남북 대화를 병행하자는 문재인 정부의 대북 화해정책은 옳지만, 그렇게 하려면 우선 남남갈등부터 해소해 정치가 단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인터뷰가 이뤄진 건 지난달 말, 도쿄에서였다.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로 한·일 관계가 악화되고 있어 e메일 인터뷰를 추가했다.
Q :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투하에서 한반도 분단의 단초를 찾았다. 이게 한반도에 미·소 양국을 끌어들이는 원인이 됐다고 분석했다. 원폭 개발이 수개월 늦었다면 소련군 점령하에 들어갔을 것이라고도 했는데.
A : “중요한 것은 해방 후 한반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미국과 소련의 전후 구상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는 점이다. 미국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적용한다는 생각에 따라 ‘조선의 자유·독립’을 연합국의 목표로 제시했다. 그러나 유럽과 아시아에서 두 개의 적과 싸운 스탈린은 독일과 일본이 다시 일어나 폴란드나 한반도를 대소련 공격의 우회로로 이용하는 걸 두려워했고 이를 막기 위해 한반도에 친소련 정권 수립을 원했다. 이런 미·소의 대립과 냉전이 없었다면 한반도 분단은 없었을 것이다.”
Q : 분단 책임론은 진보·보수가 갈라지는 지점이다. 신탁통치를 제안한 미국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A : “신탁통치 구상이란 게 그렇게 비합리적인 것만은 아니다. 당시 미·영·중·소 4국이 공존하는 세력 균형을 위해 밸런스 파워가 필요했다. 조선 독립을 보장한 카이로선언은 윌슨적인 이상주의를 토대로 하고 있었지만 현실적으론 태평양 전쟁이 연합국 측에 유리하게 진행되면서 조선 독립을 둘러싼 국제적 권력관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개석 총통은 소련의 야심을 경계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 승인을 받는데 적극적이었지만, 인도 식민지를 갖고 있던 영국은 조선의 즉시 독립을 반대했다. 미국 정책의 핵심은 소련과의 공동 행동이었다. 때문에 한반도를 4대국의 신탁 통치하에 두고 장래의 독립 준비를 시키자는 것이었다. 분단이 아니고 통일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Q : 해방 직후 정치가 극심한 파벌 싸움을 벌인 걸 놓고 국제 정세의 흐름에 둔감했다고 비판했는데.
A : “결국 미국과 소련 정책을 잘 알고 행동한 사람이 유리하게 됐다. 이승만과 김일성이다. 미국 입장에서 김구는 임시정부의 대표였기 때문에 신탁통치의 걸림돌이 된다고 봤다. 박헌영은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독자적 세력을 가졌으니까 소련의 걸림돌이 된 것이다. 한국 지도자들이 국제 정치에 무지했고 내부 대립 때문에 통일을 못 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미·소 패권은 도외시한 채 내부 대립이 너무 심했다. 싸움을 자제하면서 ‘이 사람들이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자’라거나 하면서 단합하는 정치적 지혜가 필요했는데 그걸 보지 못했다. 그러나 역시 미·소가 아니었다면 통일국가는 됐을 것이다. 다만 의견 일치가 어려웠으니까 무력에 의한 통일, 즉 내전이 일어나는 걸 피할 수는 없었다고 본다.”
Q : 진보·보수가 충돌하고 있는 현 정치 상황을 어떻게 보나.
A : “이상하게도 냉전이 끝나고 민주화가 되고서 좌우 이념 대립이 강해졌다. 이념의 렌즈를 통해 현실을 해석하되, 현실과 이념의 균형을 잃어버리면 곤란해지는데 지금 한국이 그렇다. 이념 과잉이라고 할까. 현실 이상으로 이념적으로 대립하는 것, 현실을 너무 대립적 시각으로만 보는 게 문제다.”
Q : 무슨 뜻인가.
A : “통일 정책만 해도 내가 보기엔 보수와 진보 사이에 그렇게 큰 차이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박정희 대통령의 7·4 공동성명, 노태우 대통령의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과 문재인 대통령의 한반도 경제공동체는 내용적으로 보면 비슷한 얘기 아닌가. 문 대통령의 대북 유화 정책은 옳다고 보지만 그러려면 남남갈등부터 해소해야 한다. 국내에서 이념 대립이 확대되면 그 과정이 결코 순조롭게 갈 수 없다. 남북 공존을 주장하면서 왜 남남갈등을 심하게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
Q : 분단은 아직도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
A : “한반도 분단이 미·소 냉전의 산물이었다는 이 조건은 지금도 변하지 않고 있다. (소련 대신) 중국의 부상으로 미·중 대립이 냉전 시절처럼 심각해지면 한반도 안정도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현 상황과 국제 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기술, 다시 말해 외교력을 익혀야 한다. 일본과의 역사 논쟁도 마찬가지다.”
Q : 한국이 제기한 과거사 문제를 일본이 통상 제재로 맞받아치면서 한·일 관계가 악화일로다. 일본의 의도와 배경은 무엇인가.
A : “일본은 강제징용 노동자 판결 이후 8개월을 기다렸지만 한국 정부는 대응하지 않았다. 이번 일본 정부의 조치는 한국의 신속한 대응을 촉구하는 성격이 있어 보인다. 한국이 계속 무대응 전략으로 나온다면 대항 조치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Q : 명백한 보복 아닌가.
A : “일본 정부는 징용 문제의 중요성과 심각성을 어필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현실성은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있는 문재인 정권이 태도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지 기반이 동요하기 때문이다. 또 일본 경제산업성이 한국을 화이트 국가에서 제외하기 위한 법령 개정을 추진하고 있는데 대다수 일본 언론들이 비판적이다. 상호의존적 경제 구조에 역행하는 조치는 양국 국민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Q : 사태를 악화시킨 원인이 문재인 정부에 있나.
A : “한·일 관계 악화는 이명박 정부 말기부터 시작돼 박근혜 정부를 거쳐 여기까지 왔다. 문재인 정부는 처음부터 마이너스(-)로 시작한 것이다. 거기다 대법원 판결이니 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은 논리적으론 맞다. 법원이 독립성을 내세우고 있고 박근혜 정부의 사법 유착을 적폐로 규정해 수사를 벌이고 있는 국내 정치 상황에 옭매여 정부가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오코노기 교수는 해법으로 ‘한·일 역사화해재단’ 설립을 주장한다. 한국 정부와 포스코 같은 한국 기업이 주체가 되고 일본 기업들엔 자발적으로 참여를 유도하자는 것이다.
Q : 한·일 기업이 배상금을 출연하는 재단 설립안을 일본이 거부하지 않았나.
A : “위안부 재단을 한국 정부가 해산시켰기 때문에 여전히 불신이 있다. 또 법원 판결이니 일본 정부가 승복해라 하면 수용하기 어렵다. 청구권 협정으로 3억 달러를 받은 주체인 한국 정부가 주도하되, 이로써 과거사 문제가 끝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면 일본 정부도 응하게 될 것이다. 과거 3억 달러는 정부가 준 것이지 기업 돈이 아니다. 따라서 명분만 있다면 일본 기업의 자발적인 모금도 이뤄질 것이라고 본다.”
이정민 논설위원
[게시자 추가자료]
“소득 500달러 안 되던 한국, 이젠 한류로 일본 흔드네요”
[중앙선데이] 2011.01.23 00:29일본 지한파 대부, 오코노기 마사오 교수의 ‘한국 사랑 40년’
40여 년간 한국을 연구한 오코노기 게이오대 교수가 18일 도쿄의 미타 캠퍼스에서 ‘나의 한국 연구 40년’을 주제로 고별 강의를 하고 있다. [도쿄=연합뉴스] |
-한국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3학년 때인 1967년 지도교수 이시카와 다다오(石川忠雄) 선생님이 졸업논문 제목을 미리 정하라고 해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을 연구하겠다고 불쑥 말한 게 인생 항로를 결정짓게 됐다.”
젊은 날의 오코노기 교수가 1974년 연세대 한국어학당을 졸업하면서 박대선 당시 연세대 총장으로부터 졸업 증서를 받고 있다(왼쪽). 73년 연세대 한국어학당에 |
“모두 걱정했다. 솔직히 나도 불안했다. 한국 하면 독재 정권이란 등식으로 통하던 때였고 구체적으로 어떤 나라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당시 유학이라고 하면 모두 미국이나 유럽이었고, 지인들 중에는 ‘한국 가는 것도 유학이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조금 서운했다.”
-서울 생활을 하면서 문화적 충격도 컸을 텐데.
“당시와 비교하면 요즘 한국 사람들은 정말 차분해지고 조용해졌다. 그땐 아직 한국이 국제화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거칠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차장이 ‘오라이~’ 하면서 버스를 퉁퉁 치던 만원 버스를 타는 게 무서웠다. 학생식당에 가봐도 모두 매운 한식 메뉴뿐이었다. 내가 먹을 수 있는 메뉴라곤 오뎅·카레라이스·오므라이스 정도였다. 스파게티는 아직 한국에 들어오지도 않았었다. 지금은 김치를 좋아하지만 그땐 매워서 잘 먹지 못했다. 그러면 한국인 친구들이 꼭 물어본다. 일본인은 왜 김치를 못 먹느냐고.(웃음)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만둣국·삼계탕·삼겹살·순두부 같은 서민적인 음식들이다. 한국에 다녀온 사람들 중에서 음식이 별로였다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고급 요릿집에 간 사람들이다. 한국은 서민음식이 더 맛있다.”
“환영해주는 사람과 경계하는 사람 두 부류였다. 당시 일본에서 한국에 가는 지식인 중에는 공안 관계자도 제법 있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가끔 이상한 눈으로 보는 사람이 많았다. 기본적으로 3·1절, 광복절에는 거리를 돌아다닐 때 조심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만 해도 한국사회의 반일 정서가 강했는데.
“한·일 간에 야구 시합이나 권투 경기가 있는 날이면 사람들이 꼭 나를 경기장에 데려가고 싶어 했다. 아마 일본이 지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은데, 시합이 끝나면 심정이 어떠냐고 묻기도 했다.(웃음) 초반에 그런 ‘세례’를 받아서인지 이후 한·일 간 외교관계가 나빠졌다는 말이 나와도 별로 놀라지 않게 됐다. 언론들은 ‘전후 최악의 한·일 관계’라는 제목을 붙이곤 하는데, 내가 그때 겪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사회가 급격하게 변했다고 느낀 건 언제쯤인가.
“80년대 후반이다. 이 시기 한국사회는 윤택해지고 중산층이 늘어났다. 이는 70~80년대 군사 독재정권 아래서의 경제 성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평가도 많지만 군사정권이었기에 경제 성장을 빨리 이룰 수 있었다. 박정희 정권이 남긴 일을 전두환 정권에서 완성시킨 셈이다. 한국인들의 라이프스타일이 180도 변했다. 너도나도 자동차를 타고 교외로 나가 바비큐를 해 먹는 게 유행처럼 번졌다. 한국인이 고기를 그렇게 좋아하는 건 그때 처음 알았다. 마치 돈 벌면 반드시 자동차를 타고 나가 고기를 구워먹겠다고 다짐이라도 한 사람들처럼 모두 그러더라.”
-올림픽 이후 여행 자유화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물론 바깥 세상을 알게 된 영향도 크다. 하지만 공업화와 이에 따른 민주화가 가장 큰 배경이다. 내가 처음 한국에 갔을 때는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500달러도 안 되는 정말 가난한 나라였다. 그런 나라에서 지금의 한류 문화를 생산해냈다.”
-유학 시절 잘생긴 일본 청년에게 한국 여성을 소개한 사람도 있었을 법한데.
“있었다. 그땐 한·일 간 커플이 매우 드문 시절이었는데, 한 음대생과 매우 친하게 지냈다. 여성으로서는 대단한 용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 더 고맙다. 한국에서 배운 것 중 그 친구를 통해 습득한 것이 가장 많았다. 일본인인 나와 만나면 사람들이 모두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니까…. 그런 면에선 미안한 마음,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다. 하지만 (결혼은) 자신이 없었다. 학자로서 성공할 자신도 없었고, 억지로 그 친구를 일본으로 데려와 행복하게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엔 헤어지는 게 너무 힘들었다.”
-한국 유학생활에서 얻은 것은.
“2년의 유학 경험은 매우 강렬했다. 남북대화가 시작되고 계엄령 선포와 공업화·학생운동이 시작된 시점이었다. 이후 벌어질 한국 현대사를 2년간 예습한 것 같은 경험이었다.”
-이후 게이오대 강단에 선 뒤 배출한 제자 중에는 한국인도 많았을 텐데.
“첫 한국인 제자는 신지호 의원이다. 뉴라이트의 기수다. 부산대의 신정화 교수, 최근 동서대 총장에 선임된 장제국 교수, 국민대 일본학연구소의 최희식 교수, 조선족 이송일 교수 등이 있다. 내 밑에서 학자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다. 초기에 일본에 유학 왔던 사람들은 운동권 출신이 많았다. 도피해 온 사람들이었다.”
-한국인 유학생들을 어떻게 평가하나.
“우수하다. 에너지가 넘치고 머리가 좋다. 지금까지는 뚜렷한 목적을 갖고 유학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일본 학생들보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의욕이 넘쳤다. 하지만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을 보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사회는 경쟁이 너무 치열하다. 그래서 같이 망할 것 같아 안쓰럽다. 조금 더 여유를 갖고 노력한다면 좋은 성과를 얻지 않을까 싶은데…그런데도 개개인이 처한 조건이나 상황을 보면 모두 기를 쓰고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한·일 두 나라를 비교해보면 일본은 활력을 잃었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그만큼 격차가 없고 사회가 성숙·안정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에 오코노기 교수 제자와 지인들로 구성된 고마하치카이(駒八會)라는 모임이 있다고 하는데.
“게이오대 앞에 고마하치라는 술집이 있다. 체인 이자카야(술집)인데, 12~13명이 앉을 수 있는 큰 테이블이 있어서 세미나가 끝나면 대학원생들끼리 마시고 토론하는 자리였다. 그들이 추억을 더듬어 10년 전에 만든 작은 모임이다. 제자였던 신지호와 장제국, 동서대 정구종 교수 등이 멤버다. 내가 한국에 가면 모이는데 광화문에 있는 동서대 일본연구센터가 아지트다. 거기서 이야기를 하다가 1층 고깃집으로 자리를 옮겨 식사를 한다.”
-아들이 한국 기업에 취직했다고 들었다.
“4월 일본에 있는 한국 기업에 입사한다. 대학교 2학년 과정을 마치더니 1년간 한국에 유학하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유학했던 연세대에 보냈다.”
-아버지와 아들의 한국 유학생활을 비교해보면.
“나와 내 아들 세대는 완전 달랐다. 요즘 아이들은 정치·경제에는 관심도 없는 것 같다. 아들은 신촌 거리의 문화를 즐기고 한국생활을 만끽했다고 한다. 내가 한국 기업에 취직하라고 권한 것도 아닌데, 한국의 끈끈한 인간관계가 자기에겐 더 맞는 것 같다며 취업 준비를 하더라. 일본의 인간관계는 너무 담백하다고 한다. 한국인 중에 일본 음식은 싱겁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 아들이 그런 스타일이다.”
-일본에선 중년부인들의 한류 붐이 대단하다. 부인께선 어떠신지.
“한류팬이다. 나도 아내가 보니까 한류 드라마를 본다. 젊을 땐 내가 그렇게 한국을 제집 드나들 듯하며 한국 전문가라고 행세하고 다녔는데도 아내는 전혀 한국에 관심이 없었다. 내가 한국에 출장 가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선물을 사와도 반기지 않았다. 출장을 다녀오면 양복에 고기 냄새가 배었다고 투덜거리곤 했다. 그런데 10년 전부터 한류팬이 되면서 그런 트러블이 싹 없어졌다. 지금은 참기름 사와라, 고추장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한류 드라마 덕분에 집안이 평화로워졌다. 정말이지 일본엔 숨어있는 한류팬이 아주 많다. 나는 한류가 일본사회를 구했다고 평가한다. 일례로 우리 옆집의 노부부는 매일 밤 한류 드라마를 즐긴다. 자기들의 연애시절을 회상하면서 본다는데, 부부 금슬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과거 일본의 정서가 지금의 한류 드라마에 녹아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교린(杏林) 대학에서 석좌교수로 나를 위촉해줬다. 정년퇴임을 하더라도 게이오대 현대한국연구센터의 일을 도울 생각이다. 남은 인생도 ‘한반도 분단과 통일’을 연구하는 데 바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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