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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하의 런던이야기] [4] 영국 펍(pub)에서 종업원 기다렸다간…/ [5] 초라한 영국 총리 관저

바람아님 2019. 8. 7. 08:41


[권석하의 런던이야기] [4] 영국 펍(pub)에서 종업원 기다렸다간…


(조선일보 2019.07.17 권석하 재영 칼럼니스트)


영국 펍(pub·사진)에서는 종업원이 테이블로 주문을 받으러 오지 않는다. 손님이 바(bar)로 가서 종업원에게 주문하고

돈을 먼저 낸 뒤 마실 걸 들고 자기 자리로 돌아오거나 바 근처에서 서서 마신다.

이걸 모르고 테이블에 앉아 마냥 기다렸다간 결국 영업 끝나는 시간까지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다.

주문받으러 다니는 종업원을 줄이겠다는 이유보다는 손님들이 바 근처로 모여들게 하겠다는 뜻이 깃든 전통이다.

줄 서기가 국가 운동(national sport)이라 버스 정류장에서 혼자서도 줄을 선다는 영국인이 유일하게 줄을 서지

않는 곳이 펍 바이다. 바 근처에 여기저기 서 있으면 웨이터가 귀신같이 누가 먼저 왔는지 알고 순서대로 주문받는다.

종업원의 간택을 기다리는 동안 생면부지 옆 사람에게 말을 걸어 담소를 나누면 된다.

내가 말을 안 걸면 그쪽에서 말을 걸어 온다. 바 근처는 치외법권 지역이라 누구에게 말을 걸어도 절대 실례가 되지 않는다.

옆 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오히려 실례가 된다. 그래서 청춘 남녀가 서로 첫 만남을 시작하는 곳이다.

영국 펍은 단순히 술을 사서 마시는 곳이라기보다 일종의 동네 사랑방 같은 곳이다.

성인이 되면 여기서 친구를 만나고, 이성을 만나고, 자식 낳으면 일요일에 데리고 와서 정원에서

동네 애들과 같이 놀게 하는, 어찌 보면 영국인의 심장 같은 곳이다.


영국 펍
/블룸버그

대부분의 영국인은 숫기가 없어 먼저 말을 잘 걸지 않는다. 이런 얘기가 있다. 유럽 남자 두 명이 무인도에 떨어졌다.

10년 뒤에 가 보니 이탈리아인은 각각 하나, 그리고 같이 하나 해서 정당 3개를 만들어 정치를 하고 있었다.

프랑스 남자 두 명은 급한 나머지 연인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영국 남자 둘은 그때까지 말을 안 하고 있었다. 중간에 둘을 소개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이다.

이런 영국인이 서로 사귀고 함께 살아가도록 펍을 동네마다 만들어 놓았다.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자기 마실 걸 직접 사서 마시는 혼술, 혼밥을 하되 모여서 같이 살아가라는 장소가 펍이다.

펍이 있어 프라이버시를 목숨같이 여기는 영국인들도 외롭지 않다.
 



[권석하의 런던이야기] [5] 초라한 영국 총리 관저


(조선일보 2019.08.07 권석하 재영 칼럼니스트)

지난 2013년 평창 동계 스페셜 올림픽 영국 통역으로 참여한 덕분에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영국 총리 집무실 겸 관저에

초대를 받아 가본 적이 있다. 인근의 격식을 갖춘 정부 대형 석조 건물 사이 골목 안 3층 연립주택 중 하나인 관저는

안이나 밖이나 여염집 같다. 세계 5위 경제국의 총리 관저라기엔 너무 초라하다.

놀라운 점은 총리 집무실인데도 총리 사무실이 따로 없고 총리가 사무를 보고 개인 사물을 둘 책상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고(故) 마거릿 대처 전 총리는 버컹엄궁이 바라다보이는 서쪽에 있는 관저 도서관 열람 책상을 자주 사용했다고

안내인은 설명했다. 내각 회의실〈사진〉은 더욱 놀라웠다. 방이 워낙 비좁아 내각의 32명 전원이 앉기에도

작아 보이는 타원형 테이블을 놓고 나면 벽에 붙어 걸어 다니기도 힘들 정도였다. 장관 의자는 팔걸이도 없었다.

총리 의자만 팔걸이가 양쪽에 있었다. 테이블이 워낙 작은 탓에 내각 회의 사진을 보면 옆 사람과 거의 어깨가 닿아 있다.

영국 총리는 이·취임식이 없다. 정권 인수 기간도 없고 인수위원회도 없다. 당선이 확정되면 다음 날 바로 업무를 시작한다.


영국 내각 회의실
/게티이미지코리아


영국 총리 영문 명칭은 prime minister이다. 장관(minister) 중 수석(prime)일 뿐이라는 뜻이다.

총리는 내각회의를 주재하는 일종의 의장이지 측근 참모들과 결정해 장관들에게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자리가 아니다.

총리는 장관을 임명할 때 당내 역학 구조에 따라 결정해야지 독단으로 결정할 수 없다.

테리사 메이 전 총리가 자신을 흔들어 떨어뜨린 현 보리스 존슨 총리를 내각 서열 1위 외무장관에 임명한 사실이

좋은 예다. 따라서 영국 정치는 총리가 장관들과 함께 '팀플레이'로 일을 해 나가야 한다.

영국인들은 정부 정책이 잘못되면 총리가 아닌 해당 장관 이름을 들어 욕을 한다.

장관이 책임지고 정책을 처리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영국 정부는 집권당 내부 견제와 균형에 의한 협의와 합의로

운영되기 때문에 인구 6687만명의 영국을 대표해서 이끌어 갈 총리를 보수당원 9만2153명이 선출해도 문제가 없다.

당내 역학 구조가 깨지거나 여당의 존립을 흔들 정도로 실정하면 결국 대처, 토니 블레어, 메이 전 총리처럼

임기 중이라도 총선 없이 총리가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