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8.09 정권현 논설위원)
1990년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방일한 노태우 대통령에게 언급한 '통석(痛惜)의 염(念)'은 두고두고 사과의 진정성 논란을
남겼다. '아프고 안타까운 마음'이라는 뜻인데, 직접적인 사과 의미가 담겨 있지 않다고 해서 반발을 불렀다.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은 다시 이 말을 끄집어내서 "(일왕이) 통석의 염 같은 표현을 쓰려면 한국에 오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한국에 우호적인 아키히토 일왕이 정치권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심 끝에 선택한 표현이라는 회고담이 나왔다.
▶한·일 양국은 미묘한 언어 차이로 외교 갈등이 증폭되는 경우가 있다.
일본과 협상하면서 "전향적으로 검토(檢討)하겠다"는 답변을 들으면 그 협상은 실패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한국에선 '검토'라는 말이 적극적인 의미지만 일본에선 면피성 발언이거나 부정적 의미가 강하다.
'유감(遺憾)'은 정식 사과는 아니지만, 한국보다 일본에선 더 정중한 느낌으로 쓰인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같은 한자말이라도 의미나 뉘앙스가 전혀 다른 경우도 있다.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을 일컫는 '팔방미인(八方美人)'은 일본에선 누구에게나 잘 보이도록 처신하는
기회주의자라는 뜻으로 통한다. 애인(愛人)은 불륜 상대라는 의미다.
한국 언론이 흔히 '극우' 또는 '우익'이라고 지칭하는 일본 정치인들은 이런 표현을 지극히 모욕적인 의미로 받아들인다.
일본에선 극우 또는 우익은 적군파(赤軍派) 같은 테러분자와 같은 수준으로 공안 경찰의 감시와 견제를 받는다.
▶1995년 일본 정부 주도로 설립된 아시아여성기금이 실패한 것은 오역(誤譯) 탓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아시아여성기금 측은 피해자 지원의 성격을 '쓰구나이킨(償い金·속죄금)이라고 밝혔는데,
일부 언론이 '위로금'이라고 번역했다.
이 보도가 나가자 당사자들은 "위로금을 받는 거지가 아니다. 일본 정부의 직접 사죄와 보상을 원한다"며 반발했고
아시아여성기금 활동은 중단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일본을 비판하면서 사용한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는 표현을 일본 언론들이 지나치게
사전적으로 번역 보도하는 바람에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일본 마이니치신문의 지적이 있었다.
적반하장은 우리 생활에서 '잘못한 사람이 오히려 화를 낸다'는 의미로 쓰인다. 문 대통령도 그런 뜻으로 썼을 것이다.
그런데 적반하장은 일본에서는 쓰이지 않는다.
그런데 일본 언론이 이를 '도둑이 오히려 뻔뻔스럽다(盜っ人たけだけしい)'고 번역했다는 것이다.
'도둑'이 나오니 의미가 크게 달라지고 말았다.
'時事論壇 > 橫設竪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자 칼럼] '자랑스런 동문'과 '부끄러운 동문' (0) | 2019.08.11 |
---|---|
[기자의 시각] 빨리빨리 對 모노즈쿠리 (0) | 2019.08.10 |
[분수대] 철 지난 종속이론 (0) | 2019.08.09 |
원균은 칠천량서 전사했지만, 입으로 싸우던 사람들은..역사는 반복된다 (0) | 2019.08.07 |
[만물상] '기분 좋은' 외신 보도 (0) | 2019.08.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