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고전·고미술

[동양화가 말을 걸다]당신께 드리고 싶은 새해 첫 선물

바람아님 2014. 1. 1. 10:58
▲ 작자 미상 ‘십장생도 10곡병’ 19세기, 비단에 색, 151.0×370.7cm, 삼성리움미술관

   

우와! 오셨군요. 드디어 오셨군요. 1년 동안 당신을 기다렸는데 이제야 도착하셨군요. 밤길에 오시느라 얼마나 힘드셨어요.

더디 오셔서 폭설 때문에 못 오시나 했어요. 군불 지펴놨으니 어서 들어와 뜨뜻한 아랫목에서 몸 좀 녹이세요. 그동안 저는

아침상을 차릴게요. 찬은 없지만 현미밥에 시래기국을 끓여놨으니 맛있게 드세요. 동치미국물도 적당하게 익었고요. 된장에

박아 둔 깻잎도, 간장에 절여 둔 고추도 마침맞게 간이 배었어요. 여행길에서 지친 당신의 입맛을 되돌려 줄 거예요. 우선

식사부터 하신 후 커피 마시면서 밀린 얘기 함께 나누어요. 아 참, 제가 당신을 위해 1년 동안 준비한 선물이 있어요. 마음에

드실지 모르지만 제가 식사를 준비할 동안 호박죽 드시면서 편안히 감상하고 계세요. 당신을 향한 새해 첫 선물이랍니다.
   
   
   그림 속에 해, 달, 구름, 거북을 그린 이유
   
   ‘십장생도(十長生圖)’예요. 세화(歲畵)를 대표하는 작품이고요. 새해를 축하하고 한 해 동안 액운 대신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하는 뜻을 담아 정초(正初)에 왕이 신하들에게 나누어주던 그림이에요. 세화를 주는 풍속은 고려시대부터 세시풍

속의 하나로 행해졌는데 벽사(辟邪)와 진경(進慶)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대요. 나쁜 일은 막아주고 좋은 일만 생기게 해

달라는 뜻이지요. ‘십장생(十長生)’은 장수를 상징하는 열 가지의 사물을 뜻해요. 해, 구름, 산, 바위, 물, 학, 사슴, 거북, 소나무,

영지가 대표적이지요. 구름 대신 달이, 바위 대신 대나무로 그려지는 등 문헌마다 장생물이 약간씩 다르게 표현되기도 해요.

조선 후기에는 복숭아나무와 대나무를 추가시켜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었어요.
   
   십장생에 선발된 사물은 해와 구름 같은 자연물에서부터 학과 거북, 소나무와 영지 등의 동식물까지 분포지역의 스펙트럼이

아주 넓어요. 한 장소에 그려 놓았지만 그림 속으로 초청받기 전까지는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이였어요. 이렇게 ‘가까이 하기에

는 너무 먼’ 그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공통점은 단 한 가지. ‘상서롭다’는 것이었어요. 그저 바라만 보아도 좋게 해 주는

존재들이니 누군들 반기지 않겠어요.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서로가 서로에게 십장생 같은 존재가 된다면 굳이 이런 우의적(寓意

的)인 사물을 빌리지 않더라도 만남 자체가 상서로워지겠지요.
   
   십장생도를 그림의 소재로 쓴 가장 큰 이유는 장수(長壽)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어요.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으로서 조금

이라도 더 오래 살고 싶은 욕망과 기원이 예술작품으로 표출되었어요. 이런 작품의 배경에는 ‘불로장생(不老長生)’을 추구하던

도교(道敎)의 신선사상(神仙思想)이 큰 영향을 미쳤을 거예요. 십장생이 있는 공간이 바로 신선들이 사는 ‘선경(仙境)’이자 불사

(不死)의 ‘파라다이스(樂土)’이니까요.
   
   십장생도는 처음에는 궁중에서만 사용했어요. 왕, 세자의 결혼식이나 즉위식 혹은 책봉을 하는 가례(嘉禮)와, 회갑잔치 같은

수연(壽宴) 등 국가적 행사에서 왕과 왕비의 장수를 기원하고 행사장을 화려하게 치장하는 용도로 제작되었어요. 궁중의 모든

그림을 도맡아 그린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들의 가장 큰 의무도 왕의 어진(御眞)을 제작하는 것과 함께 십장생 병풍을

그리는 것이었어요. 왕이 신하들에게 내려주는 세화로 널리 퍼지면서 민간에서도 축수용(祝壽用) 그림으로 애용된 거지요.
   
   
   당신은 왕보다 귀한 사람
   
   어때요? 너무 눈부신가요? 화려하다고요? 새해잖아요. 오늘만큼은 결핍이니 곤궁이니 하는 헐벗은 단어는 쓰지 않기로 해요. 고립이니 소외니 하는 외로운 단어도 마찬가지고요. 이렇게 떠들썩한 축복을 받으며 날렵하게 한 해를 시작해도 조금 걷다 보면

어느새 생의 피로가 실타래처럼 뒤얽힌 길을 뚫고 가야 하잖아요. 그러니 지금은 그저 차분히 이 순간을 즐기고 누려야 할 때.

오늘만큼은 스스로를 따뜻하게 토닥거려 주고 격려해 주세요.
   
   원래 십장생을 포함한 길상도(吉祥圖)는 그림으로만 그려진 것이 아니었어요. 자수, 도자기, 나전칠기, 금속공예품 등 가능한

모든 매체에 길상도를 그렸어요. 오늘은 제가 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도’만 준비했지만 세화로 그려지는 길상도는 이뿐만이 아니에요. 부귀·영화·다남(多男)·출세·재물·건강·장수 등등 인간의 소망을 담아줄 수 있는 소재라면 무엇이든 길상도로 환영받았어

요.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백동자도(百童子圖), 모란도, 송학도(松鶴圖), 석류도, 군접도(群蝶圖), 약리도(躍鯉圖), 기명절지도

(器皿折枝圖)…, 놀랍지 않나요. 눈이 닿고 손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 길상도를 그렸다는 사실이 말이에요. 길상도가 넘치게 풍부

하다는 사실은 그만큼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하는 것일지도 몰라요. 우리의 삶이 얼마나 다치기

쉽고 부서지기 쉬우면 매순간 힘을 얻고 확인할 수 있는 증거물이 필요했을까요.
   
   그런데 당신, 갑자기 왜 웃어요? 우리 같은 서민들이 누리기에는 너무 사치스러운 그림이라고 생각하는군요. 물론 잘 알아요.

그러나 이젠 시대가 달라졌어요. 저한테 당신은 왕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에요. 대통령이나 장관이나 재벌 총수만이 이런 사치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당신도 그들만큼 충분히 이런 사치를 누릴 권리가 있어요. 집이 좁다고 걱정할 필요없어요.

이 그림은 넓은 공간이 필요하지 않아요. 컴퓨터 바탕 화면에 깔아 놓으면 충분해요. 문화와 권리는 소유하는 자의 몫이 아니라

누리고 향유하는 자의 몫이에요.
   
   
   새해 선물은 ‘무병장수’
   
   아침 준비 다 됐어요. 어서 식탁으로 오세요. 장수의 지름길은 아침밥을 챙겨 먹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대요. 작년 이맘때 당신

과 헤어져 돌아서는 순간부터 내내 생각했어요. 당신한테 주는 세화에 올해는 어떤 내용을 담을까 하고요. 처용(處容)상이나

종규(鐘馗)상이 좋을까. 닭이나 호랑이가 좋을까. 요지연도(瑤池宴圖)나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 같은 축수적인 그림은

어떨까. 그런데 얼마 전에 당신이 고혈압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때 생각했어요. 당신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무병

장수(無病長壽)’가 아닐까 하고요. 오늘 아침상에 흰쌀밥과 고깃국 대신 현미밥에 시래기국을 올린 이유도 다 그런 배려에서

였어요.
   
   내가 사랑하는 당신.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에요. 저는 1년 후 새해 첫날에 다시 올게요. 내년 이맘때 다시 만날 때까지

한 가지만 꼭 기억해 주세요. 제가 삼백예순다섯 날 동안 당신을 위해 아침마다 눈부신 태양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요.

‘새벽’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저는 오로지 당신의 삶이 풍부한 지혜와 행복으로 충만하기를 기원하며 하루도 잊지 않고 동쪽

창문을 비출게요. 행복하세요. 사랑하는 당신.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 대학원, 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거침없는 그리움’ ‘꿈에 본 복숭아꽃 비바람에 떨어져’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우리나라 대표 그림’ ‘그림공부, 사람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