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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평중 칼럼] 적대 정치는 민주주의의 敵이다

바람아님 2019. 10. 25. 17:42

(조선일보 2019.10.25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조국 사태 밑바탕엔 문 대통령의 무능보다 적을 궤멸시키려는 적대 정치가 있다
분할 통치 폐기치 않으면 文정권 장래도 없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한국 민주주의의 총체적 위기다. '조국 사태'는 이제 '문재인 사태'로 비화했다.

조국 사태가 문재인 정부의 통치력과 민주적 정당성을 근원적으로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공정'을 스물일곱 차례나 강조한 문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에 대한 시중의 반응은 차갑다.

공정으로 혁신과 포용을 이끌겠다는 대통령 연설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집권 반환점을 앞두고 문 정부의 통치 헤게모니가 치명적으로 균열되고 있다.

문 대통령이 조국 사태를 수습할 기회는 많았다.

조 전 장관 사퇴까지 무려 68일간 지속된 통치 헤게모니 악화 과정은 어지러울 정도였다.

청와대의 거듭된 오판과 실기(失機)가 국정 위기를 증폭시킨 건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조국 사태의 밑바탕엔 문 대통령의 무능보다 훨씬 심각한 통치 패러다임의 구조적 위기가 자리한다.

정치를 적과 동지의 이분법으로 나누어 적을 궤멸시키려는 적대 정치가 그것이다.


문재인 정권의 적대 정치는 야당과 비판 세력을 정치적 경쟁자로 보지 않고 척결해야 할 적(敵)으로 여긴다.

스스로 진리와 정의의 사도라고 확신한다.

문 정권은 줄곧 적대 정치의 행태를 보여 왔고 조국 사태는 그 필연적 귀결이다.

시민들의 분노에도 문 대통령이 진솔한 사과를 거부하는 본질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통령은 조국을 택한 자신의 결정이 옳다고 믿는 것 같다.

문 대통령이 조국 낙마를 언론과 야당, 검찰 같은 기득권 세력의 저항 탓으로 돌리는 게 그 증거다.

삼권분립의 민주주의 원리에 역행하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를 검찰 개혁의 상징으로 고집하는

대통령의 억설(臆說)도 적대 정치의 산물이다.


적대 정치는 분할 통치(divide and rule)에 의존한다.

적을 박멸하기 위해 우리 편은 늘리고 적은 고립시켜 결정적 승부에 대비한다.

문 정권엔 차기 총선과 대선이야말로 장기 집권으로 가는 결정적 중대 선거이다.

그리하여 권력의 본질적 속성인 분할 통치를 극단화했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를 장악하고 사법부와 야당 일부를 우군화(友軍化)한 데다 언론과 시민단체까지 포섭해

야당과 비판 세력을 타격하는 구도다.

적대 정치의 선봉장이 된 어용 지식인들은 진영 논리의 패악질을 무한대로 팽창시켰다.

요설(妖說)로 공론장을 어지럽혀 옳고 그름의 경계를 혼미하게 만든다.


문재인 정권의 적대 정치와 분할 통치는 광장 정치를 직접민주주의로 미화하는 데서 절정에 이른다.

하지만 획일적 광장 정치와 다원적 광장 민주주의는 전혀 다른 것이다.

고대의 직접민주주의가 근대 정당을 매개 삼아 대의민주주의로 진화한 데는 필연적 이유가 있다.

고대 아테네 주민들 가운데 참정권을 행사한 시민들은 소수에 불과했고 중요한 국정은 대리인이 수행해야 했다.

광장을 찬양하는 문 정권이 자신들을 비판하는 보다 큰 광장의 목소리는 무시하는 것도 적대 정치와 분할 통치 때문이다.

적대 정치가 극단으로 치달으면 파시즘의 논리로 퇴행한다.

정치를 '적과 동지의 생사를 건 투쟁'으로 정의한 건 나치 어용학자 카를 슈미트(Carl Schmitt·1888~1985)였다.

살아 있는 권력을 우상 숭배한 민중의 열광이 파시즘을 만들었다.


현대 민주주의가 민주 절차를 거쳐 붕괴하는 현상도 의미심장하다.

선출된 독재자는 민주제도의 핵심인 '심판을 매수하고 경기 규칙을 바꿔' 합법적 장기 집권의 길을 연다.

한국의 제왕적 대통령이 장악하게 될 공수처가 검찰과 법원을 통제하는 게 곧 심판 매수에 해당한다.

공수처 체제였다면 조국 사태는 은폐되고 정경심 교수 구속은 어려웠을 것이다.

민주정치의 심판인 검찰과 법원의 독립성이 무너지면 삼권분립도 허물어진다.

장기 집권을 위한 선거법 개편으로 경기 규칙을 바꾸면 민주주의는 형해화한다.

'민주주의 운동장'이 통치자에게 유리하게 기울 때 민주주의는 붕괴한다.


문 정권의 적대 정치야말로 조국 사태를 문재인 사태로 키운 주범(主犯)이다.

한국 사회가 증오로 쪼개지고 민주주의는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

촛불의 최대 수혜자인 문재인 정권이 한국 민주주의를 총체적 위기로 몰아넣었다.

대통령은 하늘을 찌르는 국민의 고통과 불안을 덜어주어야 한다. 민심의 처절한 절규에 응답하는 게 정치의 소명이다.

당·정·청 일신(一新)을 통한 거국 통합 내각과 과감한 정책 전환으로 공존의 물꼬를 터야 한다.

적대 정치는 민주주의와 동행할 수 없다.

적대 정치를 폐기하지 않고선 문재인 정권의 장래는 없고 대한민국의 미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