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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오늘] 춘천 가는 길

바람아님 2019. 12. 21. 08:48
아시아경제 2019.12.20. 11:46

'왜 느닷없이 불쑥불쑥 춘천을 가고 싶어지지/가기만 하면 되는 거라/가서, 할 일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거라.'(유안진,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


춘천, 그곳은 어디인가. 시인은 '몽롱한 안개 피듯 언제나 춘천 춘천이면서도/정말, 가본 적은 없지/엄두가 안 나지, 두렵지, 겁나기도 하지'라면서도 '쌓이는 낙엽 밑에는 봄나물 꽃다지 노랑웃음도 쌓이지/단풍도 꽃이 되지 귀도 눈이 되지./춘천이니까.'라고 찬송한다. 유안진에게 춘천은 '지명(地名)부터 세속적인 지명이 아닌 시적인 곳'이다.


세상을 떠난 시인 박남철에게는 '서울 사람의 정신적 피난처와 같'았다. 춘천 출신 남편과 결혼한 뒤 줄곧 춘천에서 생활한 소설가 오정희는 '원하는 만큼의 고독ㆍ고립ㆍ차단ㆍ유폐가 있는 곳이고, 작가로서 필요한 낯섦ㆍ거리감을 유지시켜주는 도시'라고 설명한다. 소설가 박형서는 '풍광을 배경처럼 거느린 추억으로 인해 뇌리에 각인된다'고 했다.


시인 이문재는 '지금도 청량리역 앞을 지날 때면, 맥박수가 달라진다'고 고백했다. 그에게 춘천은 곧 경춘선 열차이며, 일상과 학교와 자신으로부터의 탈출구였다. 춘천 가는 길은 그렇게 청량리역 앞 광장에 우뚝 선 시계탑 앞에서 시작되었다. 대개는 소주와 찝찔한 새우과자 봉투를 비밀처럼 간직한 채 서울을 떠나곤 했다.


지난해 별세한 시인 이승훈은 춘천 사람이다. 그는 고향을 "가을 산길의 들국화처럼 자그만하고 애잔한 곳"이지만 "상당히 화려한 곳이어서 촌스러운 아름다움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고 소개했다. 또한 그 도시는 안개 속에 묘약을 풀어 억센 처녀마저 "춘천을 다녀 온 후 물속에 풍덩 빠졌다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눈빛과 목소리가 촉촉해"지게 만들었다(오정희).


사랑이거나 피난처이거나 고독이거나 유폐이거나 사랑의 용광로이거나 그 무엇이었던 공간. 그곳을 향해 출발한 열차는 성북과 화랑대를 지나쳐 대성리와 가평, 강촌을 스쳐 춘천역 앞에 한 시대의 희망과 절망과 우울과 호기심을 부려놓았다. 그러나 정작 싸늘한 역전에 발을 디디고 서면, 딱히 갈 곳이 없었다. 버스를 타고 소양강 댐을 찾아가 콧물이나 흘렸을까.


'그곳에 도착하게 되면 술 한 잔 마시고 싶어/저녁 때 돌아오는 내 취한 모습도 좋겠네.' 가수 김현철의 노래처럼 방금 떠오른 달 아래 마지막 한 잔을 기울인 다음 서울 가는 기차에 몸을 실으면 달빛은 끝내 따라와 그림자 끝에 매달리곤 하였다. 왜 그토록 서러웠는가. 춘천 다녀온 나그네는 청량리역 근처 어느 골목으로 달빛을 이끌어 술 한 잔을 따라주었다.


경춘선 무궁화호는 수인선 협궤열차와 더불어 베이비붐 세대의 정서를 사로잡았다. 1939년 7월25일 개통된 이 철로는 2010년 12월21일 복선전철 개통과 함께 수도권 전철로 편입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신 수도권 전철 경춘선, ITX-청춘이 상봉역과 춘천역을 오가고 있다. 성동~화랑대 구간은 폐선되었다.


과거의 풍경은 끝나버린 사랑과 같다. 가없는 기대는 미라가 되어 잠들었다. 다만 꿈이나 추억 같은 것이 끄나풀처럼 의식의 주변을 맴돈다. 그래서 소설가 윤후명은 타이르는 것이다. "진실로 그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은 그 풍경 속의 가장 쓸쓸한 곳에 가 있을 필요가 있다. 진실한 사랑을 위해서는 인간은 고독해질 필요가 있는 것과 같다."


허진석 시인·한국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