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두 교황
동아일보 2019.12.25. 03:02세상은 어떤 지도자를 더 필요로 할까. 2005년 즉위한 베네딕토 교황은 몇 년간의 경험으로, 원리원칙을 고수하는 자신보다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2013년 자리를 내려놓으며 개혁적인 베르고글리오(프란치스코 교황의 본명) 아르헨티나 추기경이 교황이 되어 교회를 이끌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사제들의 성추문과 비리, 교조적 입장으로 인해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진 상황이긴 했지만, 종신직인 교황의 고뇌와 결단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은 처음에는 교황이 될 자격이 없다며 한사코 거부했다. 특히 아르헨티나 예수회 수장으로서 독재정권에 더 당당하게 맞서지 못했고 무고한 인명의 희생을 막지 못했다는 죄의식이 그를 짓눌렀다. 베네딕토 교황은 그러한 뉘우침과 죄의식이 그를 더 겸손하고 더 포용적인 교황으로 만들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영화에 나오는 다른 추기경의 말처럼, 지도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야말로 지도자가 될 자격이 있는지도 몰랐다. 교황은 거의 모든 면에서 자신과 반대되는 ‘적’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세속적인 정치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변화를 가르침의 핵심으로 삼았던 예수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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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흥미진진한 두 교황의 대화
감독:페르난두 메이렐레스
출연:앤서니 홉킨스, 조너선 프라이스, 후안 미누진
가족 중 한 명의 부고를 들었을 때, 그는 마침 로마에 있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하는 아침 미사가 막 시작될 참이었다. 고인을 추념하기에 더 좋은 장소는 없어 보였다.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을 가득 메운 5만명 인파 속에 작가 앤서니 매카튼이 섞여 들어간 사연이다.
마치 록스타를 대하듯 교황에게 환호하는 사람들 틈에서 여자친구가 들려준 이야기. “지금 다른 교황은 이 광장 뒤 작은 수도원에 있다지, 아마?” 갑자기 궁금해졌다. 교황 두 명이 동시에 생존한 적이 있었나? 600년 전쯤에 마지막으로 한 번. 그때 이후로는 줄곧 이전 교황이 세상을 떠난 뒤에야 새 교황이 선출되었다. 특히 “온전히 본인의 자유의지로” 중도 사임한 교황은 2000년 가톨릭 역사에서 처음이라고 했다.
또 궁금해졌다.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주의자 베네딕토 16세가 어떻게 가장 전통적이지 않은 선택으로 혁신을 일으켰을까? 그가 동의할 수 없는 신념을 가진 진보주의자에게 어째서 모든 권력을 넘겨주기로 결심한 걸까? 액면의 사실이 말해주지 않은, 이면의 진실을 알고 싶었다. 상상과 취재가 함께 시작됐다.
전임 교황 사임과 신임 교황 취임 사이, 두 사람이 단둘이 만났다면? 밤이 깊도록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면?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속마음을 서로에게 내보이다가도, 양보할 수 없는 각자의 신념이 불쑥불쑥 뜨겁게 부딪쳤다면?
만남은 가상의 설정이지만, 두 사람의 실제 발언과 기고를 토대로 대화를 구성했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을 쓰며 스티븐 호킹의 삶으로 들어갈 때처럼, <다키스트 아워>를 쓰며 윈스턴 처칠의 마음을 탐험할 때처럼, <보헤미안 랩소디>의 각본을 준비하며 프레디 머큐리의 인생을 재구성할 때처럼, 작가 앤서니 매카튼은 두 교황이 속한 서로 다른 우주를 넘나들며 아주 멋지고 튼튼한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코미디에서 출발해 버디무비로
그리하여 이것은 종교영화가 아니다. 유쾌한 코미디로 출발해서 충실한 전기영화로 달리다가 극적인 성장영화로 반환점을 돈 뒤에는 뜻밖의 버디무비로 결승점을 통과하는 이야기다. 무엇보다 우리가 잊고 있던, ‘대화와 토론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시간이다. 벽을 쌓는 대신 다리를 놓으려는 두 교황. 편을 가르는 대신 곁을 나란히 하는 두 사람. 혐오와 단절의 시대, 끝까지 경청과 설득을 포기하지 않는 양극단의 두 진영. ‘그들의 대화’에서 ‘우리의 대화법’을 돌아보게 된다. “잘 짜인 대화 장면은 자동차 추격전만큼이나 흥미진진하다”라고 한 작가의 주장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었다.
<시티 오브 갓> <눈먼 자들의 도시> <콘스탄트 가드너>를 만든 브라질 감독 페르난두 메이렐레스가 연출했다. 하여간 이 사람, 영화 끝내주게 잘 만든다. 앤서니 홉킨스와 조너선 프라이스가 두 교황을 연기했다. 연기 대가들이 맞붙는 순간마다 영롱한 불꽃이 튄다. 12월20일부터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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