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敎養·提言.思考

[백영옥의 말과 글] [129] 느림보 마음

바람아님 2019. 12. 29. 08:33
조선일보 2019.12.21 03:12

백영옥 소설가
백영옥 소설가
올해 전국에 숨어 있는 책방을 찾아다니는 '동네 책방'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온종일 찍는 데다 지방 촬영이 많아서 육체적으로 힘들었지만 오래 촬영하기 때문에 함께 출연하는 작가들과 이런저런 속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건 소중한 경험이었다.

소설가, 시인, 역사학자, 건축가, 과학자 등 많은 분이 동네 책방에 출연했는데 유독 적고 싶은 말이 많은 건 시인들이었다. 주렁주렁 감이 열린 감나무를 보며 맛있겠다는 소릴 하는 내게, 저 감나무는 목이 참 아프겠다고 말하는 게 시인들 아닌가. 문태준 시인의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나무가 되지요'를 읽다가 김용택 시인이 했다는 말을 보았다.

"나무는 눈이 오면 그냥 받아들여요. 눈이 쌓인 나무가 되는 거죠.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나무가 되지요. 새가 앉으면 새가 앉은 나무가 되는 거죠."

비가 오면 젖을까 싶어 당장 우산을 펴고, 바람이 불면 시리게 스며들까 바로 옷깃을 저민다. 우리는 고통이나 시련 같은 자극에 방어적으로 반응한다. 하지만 나무처럼 내게 오는 것들을 받아들이면 어떤 세계가 열릴까. 비 오면 비 내리는 나무, 그늘이 오면 그늘진 나무로, 같은 자리에서 오래도록 한결같은 삶이지만 나무는 하루도 같은 모습이 아니고, 때로 꽃으로 때로 낙엽으로 물들고 변해간다.

전주의 한 책방에서 김용택 시인을 만났을 때, 섬진강에 대한 얘길 들었다. 70년 넘게 같은 동네 사람, 같은 학교, 같은 길이 너무 심심해서, 심심하니까 뭐든 자세히 보게 됐다고. 자세히 보니 달리 보이고, 달리 보이니 새롭게 보이고, 그걸 끄적이다 보니 시가 되었다는 것이다.

2019년을 정리하는 글을 쓰다 보니 가장 기억나는 것이 이틀 연속 산책 중 만난 공원에서 폭우 속을 우산 없이 천천히 걸었던 일이었다. 뛰지 않고 걷고자 하는 마음이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해보니, 그때 젖은 비를 가득 품고 올라온 흙냄새, 꽃 냄새 때문이었다. 그때 나무처럼 느릿했던 그 걸음이 2019년 내가 한 가장 시적인 일이었다.



[추가 게시]

참 좋은 당신   -김용택-
 
어느 봄날
당신의 사랑으로
응달지던 내 뒤란에
햇빛이 들이치는 기쁨을 나는 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가로
나를 가만히 불러내신 당신은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으로 내 앞에 서서
들꽃처럼 깨끗하게 웃었지요.
 
아,
생각만 해도
좋은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