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만물상] '국립운동권미술관' / '가짜 장발장'

바람아님 2019. 12. 31. 16:49


[만물상] '국립운동권미술관'

 
(조선일보 2019.12.28 한현우 논설위원)


미술관에 별 관심 없던 사람도 해외에 가면 미술관을 필수 코스로 들르곤 한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 많기도 하지만 편하게 찾을 수 있다는 점도 큰 이유다.

수백 개 박물관과 미술관으로 가득 찬 뉴욕 맨해튼에는 '뮤지엄 마일(Museum Mile)'이란 거리가 있다.

1.6㎞ 길이 대로 양쪽에 메트로폴리탄, 구겐하임, 뉴욕시티뮤지엄 등 9개 미술관이 늘어서서 관람객을 맞는다.

파리의 루브르나 런던의 테이트모던 역시 도심 한가운데 있다.


▶1969년 경복궁에서 문 열고 4년 뒤 덕수궁으로 옮겼다가 86년 과천 산속으로 들어간 국립현대미술관은

그런 면에서 최악의 입지였다. 2013년 옛 기무사 자리에 서울관이 개관해 큰 기대를 걸었으나 관람객 수는

몇 년째 제자리걸음 중이다. 서울·과천·덕수궁·청주관까지 합칠 경우 아시아 최대 규모라는 국립현대미술관 관람객은

올해 268만명으로 추산된다.

2018년 루브르(1020만명), 메트로폴리탄(695만명), 테이트모던(586만명)에 비해 초라한 숫자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국립현대미술관이 올해 개관 50주년을 맞아 연 전시 '광장'이 혹평을 받고 있다.

독립운동가 글씨는 위작 의혹이 불거져 전시 도중 교체됐다.

만해 한용운의 시구도 뒤늦게 인쇄 복제본임이 드러나 구설에 올랐다. 국립미술관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정식 사과 없이 슬그머니 작품을 바꾸고 표기를 추가해 또 뒷말이 나왔다.


▶특히 과천관 전시는 운동권 해방구 같은 분위기다.

중앙홀에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가 걸렸고 양옆엔 거대한 노동해방도와 전봉준 그림이 걸렸다.

이한열의 운동화와 당시 택시였던 브리사 자동차도 세워놓아 50주년 전시인지 운동권 홍보관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이 전시엔 세월호와 북한 관련 작품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평단과 언론에서 혹평이 쏟아졌다.

 "정권 코드에 맞춰 만세를 외치는 전시"라는 비판까지 나왔다.

선동이지 미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 1월 민중미술 계열 평론가를 관장에 앉히면서 이미 예견됐다.

북한을 "공공미술의 천국이자 기념비적 조소 예술의 나라"라고 칭송한 이 사람은 당시 후보 평가에서

낙제점을 받고 탈락했다가 이유도 모를 재평가를 거쳐 신임 관장에 임명됐다.

올해 주요 사업으로 '북한과 교류'를 꼽더니 아무 성과도 못 냈다.

한 나라 문화의 얼굴인 국립현대미술관장에 정권 코드 인사가 들어앉아 관객을 위한

뛰어난 전시를 고민하기는커녕 운동권 미술관을 만들고 있다.
 


[만물상] '가짜 장발장'

  
(조선일보 2019.12.30 김홍수 논설위원)


프랑스혁명 때 "빵을 달라"는 시위대에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프랑스어 '브리오슈')를 먹으면 되잖아" 했다는 가짜 뉴스가 퍼졌다.

원래 프랑스혁명 20여년 전 루소가 쓴 고백록에 나오는 표현인데 왕비의 발언인 양 선전되면서 민중의 증오심에

불을 질렀다. 왕비에겐 비정하고 철없는 사람, 사치의 화신이란 프레임이 씌워졌고 결국 단두대로 끌려갔다.


▶인천의 한 마트에서 너무 배가 고파 식료품을 훔쳤다는 10대 소년과 30대 아버지의 스토리가

가짜 뉴스 논란에 휩싸였다.

딱하게 여겨 국밥을 사준 경찰관이 표창장을 받고, 대통령까지 사건을 언급하면서 '현대판 장발장'이란

타이틀을 쓰고 주요 뉴스로 다뤄졌다. 하지만 한 언론의 심층 취재로 소년의 아버지가 택시 기사 시절 절도 전력이

여럿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학교 폭력 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33만원 닭강정 사건'도 알고 보니 사실과 달랐다.

대출사기 범죄를 공모하다 혼자 떨어져 나간 사람에게 보복하려고 다른 공범들이 그의 이름으로

닭강정을 33만원어치나 주문했다고 한다.


[만물상] '가짜 장발장'


▶현대판 장발장과 닭강정 사건은 공중파 TV 방송이 사실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고 주요 뉴스로 다루는 바람에

일파만파로 번졌다. 이 정부 들어 친정부 매체들이 진영 논리에 갇혀 입맛에 맞는다 싶으면 과장·확대 보도하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조국 전 법무장관을 수호하려는 시위를 보고 한 TV 보도국장이 "딱 봐도 100만명"이라고 했을 정도다.


▶이와 정반대 상황도 있다.

청와대는 정권 비위를 비판하는 언론에 '가짜 뉴스' 프레임을 씌워 본질을 흐리는 전략을 자주 써왔다.

엊그제도 청와대 대변인실 행정관은 법원이 조국씨의 구속영장을 기각하자

"기각 사유에 '죄질이 좋지 않다'는 표현이 없다. 언론이 소설을 막 써도 되냐"고 비난했다.

논란이 커지자 법원은 "판사가 '죄질이 좋지 않다는 표현을 썼다"고 다시 확인했다.


▶'울산 선거 공작 의혹'도 따지고 보면 현 정권 핵심들이 상대 당 후보를 모함하여 선거 구도를 바꾼 가짜 뉴스 사건이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말대로 "가짜 뉴스는 민주주의를 후퇴시킨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의 가짜 프레임 전쟁은 더 심해질 것이다.

미국의 한 팩트 체크 시민단체는 가짜 뉴스 식별법까지 내놓았다.

하지만 정권 핵심부가 진짜를 가짜로 만들고, 코드를 맞추려는 방송이 가짜를 진짜로 만드는 나라다.

이 분야에서 이보다 영리한 정권은 다시 보기 힘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