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SUNDAY 2020.01.04. 00:20
부패한 관리보다 치명적 해악
과거 적폐 때려잡는 게 아니라
스스로 안 하는 게 진정한 청산
여기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탐관오리의 학정에 시달리던 어느 마을에 수재(水災)가 발생해 수많은 사람이 목숨과 재산을 잃는다. 먹고 살길이 막막해지자 도처에 도적들이 횡행한다. 중앙정부는 유능하고 청렴하다는 관리를 파견해 도적을 소탕하고 백성을 보살피게 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 새로 온 관리들은 청렴하다는 미명 아래 도적과 내통한다는 의심만 들어도 사람들을 무조건 잡아다가 목을 베는 게 아닌가. 백성들로서는 도적에게는 재물을 빼앗기고 관리에게는 목숨을 빼앗기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유약은 노잔의입을 빌려 일갈한다.
“탐관오리는 자신의 결점을 알기에 공공연히 내놓고 나쁜 짓을 하지는 못하나, 청렴한 관리는 자신이 깨끗한 만큼 무슨 짓이든 못할 게 없다고 여겨 자기 멋대로 일을 처리한다. 내 눈으로 본 것만도 수를 헤아릴 수 없다.”
관리가 도덕적으로 우수하더라도 잘못된 신념을 가지면 부패한 관리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탐관오리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청백리한테 구원받는다는 권선징악 소설 구도에 익숙하던 당시로써는 그야말로 일대 파격이었다. 하지만 놀라운 혜안(慧眼)이 아닐 수 없다. 21세기의 문이 완전히 열린 오늘날, 이 땅에도 무릎을 칠 만한 교훈이어서 더욱 그렇다.
설명이 필요 없이 현 정권은 2대에 걸친 보수정권의 부패와 무능, 권력 다툼에 학을 뗀 국민의 선택이었다. 가뜩이나 화가 나 있는 터에 어처구니없는 비선 실세의 국정농단까지 겹쳐 더는 참을 수 없는 국민적 분노가 터져 나온 결과였다. 당연히 새 정권은 더 나으리라 기대가 됐었다. 정권 자신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노라 큰소리쳤다. 하지만 이게 웬일. 스스로 진보라 일컫는 새 정권 역시 전 정권보다 더하면 더했지 다를 게 하나도 없지 않은가.
나아가 대통령이 소원이라고 공공연히 밝힌 인물의 시장 당선을 위해 청와대 실세들이 경쟁 후보의 탈락 공작을 벌인 의혹 앞에서는 고개를 흔들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과의 친분을 악용해 온갖 추악한 갑질을 일삼던 고위공직자의 비리가 드러났는데 청와대 실세들이 이를 덮어준 의혹에는 참담함마저 느꼈다.
아뿔싸, 지금까지는 ‘새 발의 피’였다. 집권 여당이 범여권의 안정적 과반수 보장을 위해 국민은 내용을 알 필요도 없는 선거법을 강행 처리하는데 이르러서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4+1 협의체’라는 야합으로 덧대고 또 덧대 누더기로 만든 법안을 쪼개고 또 쪼갠 임시국회에서 처리하는 꼼수를 보면서는 분노가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대통령 지지세력 중에서 수장과 검사들을 뽑고, 정권 핵심과 관련해 검찰과 경찰이 인지한 사안을 보고받고 수사 여부를 결정하며, 수사 사안 이첩을 언제든 명할 수 있는 초헌법적 정권보위기구를 만드는 법안을 강행 처리하는 걸 보면서는 이제 두려움이 솟구친다. 도대체 이들은 이 나라를 뭐로 만들려는 건가.
이 정권은 출범 이후 지금까지 줄곧 한국사회의 주류세력 교체를 위해 전력해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전 펴낸 책 『대한민국이 묻는다』에서 말했다.
“가장 강렬하게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정치의 주류세력들을 교체해야 한다는 역사적 당위성입니다. 그런 말을 하고 싶은데, 그것을 국민이 심정적으로 가장 원한다 해도, 조금 걸리는 부분이 있죠. 그래서 대청산, 대개조, 시대교체, 역사교체, 이런 식의 표현들을 합니다.”
정권 전반기 내내 이어진 ‘적폐 청산’과 선관위 대법원 헌재를 비롯한 주요기관에 ‘내 편 심기’는 그것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집권당 원내대표는 그것을 ‘패권세력 청산’이라고 외쳤다. 이 무슨 오만이고 망발인가. 적폐 청산의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과거의 적폐를 때려잡기에 앞서 적폐라고 생각되는 것을 스스로 행하지 않는 것이다. 패권을 청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과거의 패권세력을 두들기기에 앞서 스스로 권력을 나누는 것이다.
패스트트랙에는 법안을 적당히 올렸다가 나중에 전혀 다른 내용을 끼워 넣은 수정안을 일방적으로 통과시키는 ‘사기’는 또 다른 적폐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동력을 계속 공급하기 위해 국민을 기득권층과 서민층으로 나누고 양자의 대립을 유도하는 건 적폐를 넘어 재앙이다. 그렇게 해서 국민이 얻는 게 뭔가. 앞 도둑에 재산 잃고 뒷 도둑에 목숨 잃는 것 말고 뭐가 있겠나.
권위주의와 기득권 타파를 위해 노력했던 노무현 정부가 실패한 원인은 기득권층으로 반발 탓이 아니라 권력이 조장하는 대립구도에 국민이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다. 정말로 이 정권이 곱씹어야 할 대목이다. 노잔이 결론을 내준다.
“그것이 작으면 사람을 죽이나 크면 나라까지 망친다.”
이훈범 대기자/중앙콘텐트랩
'時事論壇 > 時流談論'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진모의 데스크 시각] 국가는 어떻게 실패하는가 (0) | 2020.01.07 |
---|---|
[朝鮮칼럼 The Column] 대북제재 풀어주자는 의원 60명에게 묻는다 (0) | 2020.01.06 |
[이정민의 시선]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0) | 2020.01.04 |
[박정훈 칼럼] 2년 뒤가 두려울 自害 국정의 부역자들 (0) | 2020.01.03 |
<포럼>북한 조직지도부와 유사한 공수처 (0) | 2020.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