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20.01.08. 03:16
세계 인구 6분의 1 '수퍼 문명권' - 스페인~신장 광대한 땅 정복
이슬람교 강요 않고 多문화 공존.. 中 제지술 받아 '책의 문명' 꽃피워
연금술·대수학·알고리즘·알코올.. - 알칼리 등 과학용어에 '알' 정관사
최초의 아라비아 숫자 기록은 976년 한 수도원 문서에 나와
그리스·로마에 인도 지식 융합 - 천문학에 수학 더해 별 움직임 설명
아랍 과학 수용한 유럽, 17세기에 과학 혁명 거쳐 文明 주도권 잡아
alchemy(연금술), algebra(대수학), alcohol(알코올), alembic(증류기), algorithm(알고리즘), alkali(알칼리), alizarin(붉은 물감)…. 이 단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al(알)'로 시작하는 과학 용어라는 점이다. 이 단어들은 아랍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이때 'al'은 아랍어의 정관사다. 과거 발전했던 아랍 과학이 서구 과학의 기초를 제공했다는 방증이다.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어떤 문제의 해결을 산출하기 위한 규칙의 집합'을 나타내는 algorithm(알고리즘)이라는 말은 7~8세기 이슬람 수학자 알콰리즈미(Muhammad al-Kwarizmi)의 이름에서 왔다. 그의 고향이 콰레즘(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히바·Khiva)이어서 이 이름이 붙었다. 그는 '대수학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수학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algebra(대수학)라는 용어 자체도 '나뉜 부분들을 다시 합치다'라는 뜻의 아랍어 al-jabr에서 온 말이다.
8세기 이슬람권은 최초의 수퍼 문명권
아랍의 과학은 여러 문명을 포함하는 거대한 이슬람권이 형성되어 그 안에서 지식과 정보가 활발하게 교류되는 과정에서 발전했다. 7세기에 형성된 이슬람교는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광범위하게 팽창해 갔다. 아랍인 무장 세력이 주변 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복한 다음 이슬람교를 강요하는 방식이었다. 8세기 초가 되면 서쪽의 스페인부터 동쪽의 중국 신장에 이르는 광대한 땅이 이슬람권이 되었다. 이 안에 세계 인구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3000만 명 이상의 사람이 살고 있었다.
여기에서 '아랍화'와 '이슬람화'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아랍화는 아랍인들이 다른 민족을 지배하고 아랍 문화를 퍼뜨리는 현상이고, 이슬람화는 해당 지역의 기존 종교가 이슬람교로 대체되는 현상이다. 이 두 가지가 늘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8세기에 이슬람 세력의 지배하에 들어간 스페인에서는 이슬람화가 완전치 않아서 다수의 기독교 공동체(모자랍)가 굳건히 존재했지만, 대신 선진 아랍 문화를 수용하는 아랍화는 크게 진척되었다. 반대로 이란에서는 이슬람교는 일찍 받아들였지만 아랍 문화를 수용하지 않고 자신들의 전통문화를 강하게 지켜냈다.
이 시대 이슬람교는 다른 종교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대한 편이었다. 다른 종교와 문화를 가진 이민족들도 높은 세율의 세금만 내면 이슬람 세력하에 공존하는 게 가능했다. 그 결과, 최초의 글로벌 수퍼 문명권이 탄생했다. 이슬람권은 완전히 균질한 세계가 아니라 아라비아,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북아프리카, 스페인 등지에서 발전해 온 여러 문명이 공존했다. 동일한 믿음 체계와 법체계가 구축되었고, 아랍어라는 보편 언어로 서로 소통할 수 있었다. 덕분에 이 세계 안에서 상인들이 오가며 상품이 유통되고, 지식인들이 직접 왕래하거나 서신을 교환함으로써 지식과 정보가 전달되었다. 이 거대한 수퍼 문명권은 또한 외부적으로 중국, 인도, 러시아, 유럽 등 주변 문명권들과 접촉하면서 영향을 주고받았다. 외부의 문명 요소들이 이슬람권 안에 들어오면 아랍 문명과 섞이며 풍요로운 발전을 이루고, 다시 각지로 전해졌다. 이슬람권은 세계 대부분 문명의 성과물들을 수용하고 또 교류시키는 역할을 맡아서 하고 있었다.
융합의 무대에서 맞은 아랍 과학 황금기
서구 문명의 원천으로 여기는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의 성과들이 보존된 것이 한 예다. 로마제국의 붕괴 이후 문명의 빛이 스러져갈 때 플라톤이나 갈레노스 등의 고전 저작들이 이슬람권에 들어가 그곳에서 보존되었다가 후대에 재발견되어 유럽으로 역수입되었다. 흔히 유럽의 르네상스를 언급하며 이런 사실을 이야기하지만, 이때 주의할 점이 있다. 그러한 설명은 마치 고대 그리스·로마의 지식이 이슬람권에 '이식'되어 원래 상태 그대로 보존되었다가 후일 유럽이 되찾아 온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사실 르네상스 무렵 아랍에서 서구로 넘어간 지식은 고대 그리스·로마의 지식에다가 인도와 이란 등지의 지식이 더해져서 더 높은 수준으로 진화한 결과물이었다.
이와 같은 거대한 융합의 무대에서 아랍의 과학기술이 꽃피어났다. 천문학을 예로 들어보자. 아랍인들은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을 접했는데, 이 체제는 수학적 모델을 통해 별들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여기에 직접 관찰과 계산을 통해 발전한 인도 천문학의 성과들이 더해졌다. 고대 그리스의 의학자 갈레노스의 이론과 인도 약학의 지식이 더해진 의학 체계도 마찬가지다. 이런 노력의 결과, 8세기 이후 아랍 과학은 황금기를 맞이했다. 학문적 성과들은 책으로 출판되어 널리 보급되었다. 웬만한 도시는 다 도서관을 갖추고 있어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쉽게 고급 지식을 접할 수 있었다. 유럽의 학자들은 스페인이나 시칠리아 같은 이슬람권의 학문 중심지로 찾아가 배움을 구했다.
서구에 전해진 아랍의 과학은 큰 영향을 미쳤다. 아라비아 숫자 체계(정작 아랍인들은 이것을 '인도식 계산법'이라고 칭했다)가 대표적이다. 최초의 아라비아 숫자 기록은 976년 나바라 지역의 한 수도원 문서에서 찾을 수 있다.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면 '189 × 26' 정도의 계산은 쉽게 할 수 있지만, 이전의 로마 방식대로 하면 CLXXXIX(100 + 50 + 10 + 10 + 10 1 + 10)에 XXVI(10 + 10 + 5 + 1)을 곱하는 지극히 복잡한 과정이 된다. 혁신적인 새로운 숫자 체계와 계산법이 알려지고 여기에다가 요즘으로 치면 컴퓨터에 해당하는 주판까지 전달되었으니, 이런 것들이 사회 전반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렇지만 아랍 과학은 황금기를 보내고 나서 발전이 지체되었다. 이제 그 성과를 물려받은 서구나 중국이 새로운 중심지로 떠올랐다. 톨레도, 아비뇽, 몽펠리에 같은 거점 지역들에서 아랍 과학을 수용한 유럽이 17세기에 소위 과학혁명을 거치면서 근대 문명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렇게 되기까지 아랍 문명이 기반을 만들어 준 사실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1234~' '도레미파~' 이슬람서 나왔다]
사탕수수·벼·면화·수박도 전파… 8세기 현악기 '우드'는 기타 원조
이슬람권이 세계 각지로 전파한 물질문명과 정신문명 요소들은 매우 다양하다. 우선 새로운 먹을거리를 들 수 있다. 711년 이슬람 세력이 인도 북서부 지방을 정복한 후 인도 작물들이 이슬람권에 들어왔다가 세계 각지로 전달되었다. 사탕수수, 벼, 바나나, 오렌지, 레몬, 라임, 수박, 시금치, 가지, 면화가 대표적인 작물들이다. 이것들은 서쪽으로 이라크를 거쳐 스페인까지 전해졌고, 바다를 통해서는 마다가스카르까지, 또 카라반을 통해서는 사하라 사막을 넘어 열대 서부 아프리카까지 전달되었다. 더 나아가서 13세기부터는 스페인이나 시칠리아 등지를 통해 유럽 내부로도 들어갔다. 이런 신작물들이 각 지역의 물질적 기반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책의 문명'이라는 별칭이 붙은 이슬람권으로서는 제지술 또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띤다. 이슬람권에 제지술이 알려진 계기는 아랍군과 당나라군이 충돌한 탈라스전투(751년)다. 당시 중국의 제지 기술자들이 사로잡힌 결과 이슬람권에 종이 만드는 법이 알려졌고, 이후 세계 각 지역에 전해졌다. 쿠란을 보급하고, 학문 성과들을 책으로 출판하는 데에 종이가 결정적인 기반이 되었다.
서양 음악 또한 아랍 문명에서 많은 것을 받아들였다. 서양 음계의 음 이름 '도 레 미 파 솔 라 시'는 아랍어의 '달 라 밈 파 솔 람 신(dal ra mim fa sol lam sin)'에서 왔다. 11세기 몬테카시노에서 라틴어로 된 논저에 이 기록이 나오는데, 서양 음악의 새로운 기보법을 창안한 귀도 다레초(Guido d'Arezzo)가 이 책을 보았을 가능성이 있다. 더불어 악기들도 전해졌다. 예컨대 8세기에 스페인에 전달된 아랍권의 현악기 우드(oud)가 근대 기타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크다. 스페인에서 춤과 음악의 리듬에 맞추어 소리치는 '올레(olé)' 소리 역시 아랍어 왈라(wallah)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왈라는 '신에게 맹세한다'는 뜻으로서, 확실하게 믿음이 간다는 의사 표현이다. 여러모로 서구 문명의 기저에 아랍 문명이 지대한 공헌을 했다.
'人文,社會科學 > 歷史·文化遺産'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독] 30만명 보는 美과학교재에 日 731부대 만행 실렸다 (0) | 2020.01.16 |
---|---|
[이한우의 간신열전] [12] 진중권의 간신론 (0) | 2020.01.15 |
[이한우의 간신열전] [13] 광해군의 대간 이이첨 (0) | 2020.01.08 |
[이한우의 간신열전] [11] 간신을 키우는 군주의 어리석음 (0) | 2019.12.27 |
[이한우의 간신열전] [10] 忠姦 판별법 (0) | 2019.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