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11.16 노정태 철학 에세이스트)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철]
아즈마 히로키 '일반의지 2.0'
그럴싸해도 물정 모르는 소리
노정태 철학 에세이스트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든다.
엠넷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X101'과 '프로듀스48'의 순위 조작이 드러났을 때
뇌리를 스친 생각들이다. 사소한 디테일 때문에 문자투표 순위 조작을 시청자 중 일부가
알아챌 수 있었다. 의혹이 퍼져 나갔고, 경찰 수사를 통해 결국 사실로 밝혀지고 말았다.
프듀X 최종 라운드의 경우 문자투표가 도합 1300만여표가량 쏟아졌는데,
최종 득표수의 순위 간 표 차이가 29978표, 7494표, 7495표 등으로 일정했다. 일단 연습생별로 순위를 정해놓고,
그 순위에 맞춰 특정한 숫자(계수)를 할당한 다음,
계수에 일괄적으로 7494.442 혹은 그와 비슷한 상수를 곱한 것으로 보인다.
프듀48 역시 미리 순위를 정해놓은 후 계수를 할당하고 445.2178에 가까운 상수를 곱해서 나온 값을 최종 라운드의
문자투표값이라고 시청자들에게 내밀었으리라는 의혹이 제시된 바 있다.
차라리 완전한 임의의 수를 입력했다면 이런 식으로 발각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계수에 상수를 곱해서 결과를 만들어냈더라도 그 후 숫자를 꼼꼼하게 만졌더라면 이렇게 쉽게 들통나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모든 득표가 같은 숫자로 나누어지는 값이라는 게 훤히 보일 지경이었다. 조작을 해도 너무 성의가 없었다.
프듀 담당 PD 안준영(40)씨와 상급자인 총괄 프로듀서 김용범(45)씨는 디테일을, 시청자를, 국민을 우습게 본 셈이다.
이 사건은 예능 프로그램의 문제를 넘어서는 것처럼 보인다.
소수의 프로듀서가 연습생을 낙점하여 데뷔시키는 기존 시스템에서 벗어나, '국민 프로듀서'가 직접 자신들이 원하는
아이돌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프듀 시리즈의 핵심이었다.
이것은 우리 사회, 특히 정치권에 널리 퍼져 있는, 말하자면 '사이버 직접 민주주의의 환상'과도 일맥상통한다.
인터넷이나 모바일 앱, 혹은 문자메시지 등 정보통신 기술을 통해 대중의 뜻을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고,
그렇게 확인된 여론은 자동으로 정당성을 획득하며, 국가의 정책 방향마저도 그에 따라야 한다는 믿음 말이다.
일러스트= 김의균
다수의 어리석음이 공동체에 끼칠 해악에 대한 비판과 경고는 철학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플라톤의 '국가'를 그 효시로 삼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동시에 대중의 지성과 판단이 새로운 미래를 제시할 것이라는 목소리 역시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특히 정보기술이 발전한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에 이르러 더욱 큰 힘을 얻고 있다.
그러한 주장을 체계적으로 담은 책으로는 이탈리아의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가 미국의 정치이론가 마이클 하트와
함께 쓴 '제국', '다중'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아즈마 히로키의 '일반의지 2.0'을 펼쳐보자.
아즈마 히로키는 애니메이션, 게임 등 서브컬처를 통해 일본 현대 사회와 난해한 포스트모던 철학까지 꿰뚫은
회심작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으로 유명세를 얻은 1971년생 비평가 겸 철학자다.
'현대 일본 사상'을 쓴 사사키 아쓰시에 따르면 일본의 21세기 비평계는 "아즈마 히로키의 독무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의 정치론이라 할 수 있는 '일반의지 2.0'은 정보기술이 민주주의를 실현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정보기술이 도처에 깔려 있는 사회의 출현은 민주주의 그 자체를 바꿔버리며, 정치나 통치의 이미지 자체를
바꾸고 만다고 주장하는 책이다.
아즈마 히로키의 논지는 이렇다.
정치사상의 핵심 고전인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근간에는 '일반의지'라는 개념이 있다.
국가, 사회, 집단, 공동체를 형성시키는 근본 개념이다.
그런데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그 일반의지는 숫자로 파악이 가능해졌다.
데이터를 알고리즘으로 분석함으로써 대중의 '정치적 무의식'을 읽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반의지를 직접 대면하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꿈꿀 수 있다.
IT의 발전에 영감을 받은 정치이론 중 이렇게 직접적이고 전면적으로 현행 민주주의 체제에 도전장을 내민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아즈마 히로키는 "숙의(熟議)도 없고 선거도 없는, 정국도 담합도 없는"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제안한다.
국회에서 시끄럽게 싸우기나 하지 말고, 인터넷에 올라온 국민의 '진짜 의견'을 따르라는 소리다.
얼핏 들으면 그럴싸하지만 결국 기성 정치 제도의 전부 혹은 상당 부분을 파괴하자는 주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애석하게도 이는 논의의 핵심인 일반의지 개념부터 잘못 이해한 발상이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사회계약을 맺고 집단생활을 한다.
그런데 우리 중 그 누구도, 마치 부동산 매매 계약을 하듯 '사회계약'을 맺은 적은 없다.
즉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겠다'는 의사의 합의는 개별적 주체의 판단이나 고민, 결단 이전에 주어져 있다.
말하자면 집단생활과 정치를 가능케 하는 초월적 전제 조건인 것이다.
구글 검색과 알고리즘으로 일반의지를 수량화하여 분석 가능하다는 아즈마 히로키의 논의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져 있다
(보다 자세한 분석은 졸저 '탄탈로스의 신화' 중 '낭만적 거짓과 통계적 현실'을 참고해도 좋을 것이다).
굳이 루소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다. 정보기술과 데이터에 입각해 대중의 뜻을 고스란히 구현하는
'사이버 민주주의'의 꿈이 얼마나 허황한 것인지, 현재 수사 중인 프듀 조작 사건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일개 입시학원 강사도 경쟁자를 깎아내리기 위해 댓글부대를 꾸려 악플 공격을 하다가 발각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일명 '드루킹 사건'으로 불리는 더불어민주당 댓글 조작 사건이나 국가정보원 여론 조작 사건 등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청와대마저도 홈페이지에 모은 '국민청원' 중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것만 골라서
정치 쟁점으로 끌어올리고 있지 않은가.
일본에 비해 인터넷 보급이 빨랐고 정치적 열기가 뜨거운 한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
'일반의지 2.0'은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한 특징은 인터넷을 타고 열렬한 팬덤이 조직되어 퍼져 나가는 한류 열풍으로 구체화하였다.
우리가 일본에 비해 가진 장점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악용하는 자들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프듀 조작 사건, 인터넷 여론 조작 사건 등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엄단이 절실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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