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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제환 석좌교수의 메디치家 리더십]강경파 견제에 추방당한 코시모-사형 위협에도..내전 막으려 칼 안 뽑았다

바람아님 2020. 1. 14. 09:55


매경이코노미 2020.01.13. 09:24

  

메디치 가문의 수장 ‘조반니 디 비치’가 일궈온 명예와 막대한 재산은 고스란히 39세 장남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389~1464년)’에게 이어졌다. 유산은 무려 17만9221피렌체금화.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1400억원이 넘는 막대한 재산이었다. 이웃 국가 루카(Lucca)와 전쟁이 시작되자, 코시모는 전쟁을 총괄하는 ‘10인 위원회(Dieci di Balia)’에 위원으로 선출됐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이 3년이나 지속되자 피렌체 재정은 또다시 어려워졌다(1429~1431년). 피렌체 정부는 최고 부자였던 코시모에게 국가 재정을 총괄하는 공직(Ufficiali del Monte)을 맡겼다. 전쟁 비용 조달 책임자가 된 코시모는 피렌체 정부에 20만피렌체금화(약 1600억원)를 빌려줬다. 코시모가 정부 재정을 총괄하면서 메디치 가문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공직을 맡게 되는 비중이 점점 늘어갔다. 자연스레 메디치 가문의 정치적 위상은 높아졌다. 당연히 기득권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토착귀족들은 메디치 가문 부상에 심각한 위협을 느꼈다. 피렌체 정가에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메디치 가문과 토착귀족 사이에 피할 수 없는 정쟁이 시작된다. 메디치 가문의 수장 코시모와 추종자들은 어떤 지략으로 이 위기를 극복하고, 60년 동안 피렌체의 주인이 될 수 있었을까?

▶3파전으로 나뉜 피렌체 정치판

▷메디치가 몰아내려는 강경파 득세

이 시기 피렌체 정쟁은 3파전으로 전개됐다.

토착귀족으로 용맹한 중세 기사 출신인 ‘알비치(Rinaldo degli Albizzi)’를 중심으로 뭉친 매파는 메디치 일가를 사형에 처하자는 의견을 냈다. 반면 전통 귀족 출신 ‘우차노(Niccolò da Uzzano)’를 따르는 추종자는 매파 알비치와 신흥 메디치 당파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메디치 당파는 코시모를 중심으로 신흥 부르주아 계층이 결속력을 강화해나갔다.

메디치 당파 처리 문제를 두고 매파와 중도파 사이 설전이 자주 벌어졌다. 그때마다 존경받던 중도파 지도자 우차노가 설득해나갔다. 당시 토착귀족이 개최한 자문회의(Consulte e Pratiche)에서 우차노가 행한 연설 내용을 옮겨본다.


“당신들이 메디치 가문을 추방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피렌체에는 메디치 가문 친구들이 많이 남아 있고, 그들은 메디치 가문의 귀환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당신이 무슨 수로 메디치 가문이 돌아오는 걸 막겠는가? 그를 몰아내려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적을 만들게 될 것이다. 그가 다시 돌아오면 당신은 추방될 것이 자명하다. 만약 메디치 가문의 우두머리인 코시모를 살해한다고 가정해보자. 우리 공화국에 아무런 득이 없다. 알비치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자. 그러면 자신뿐 아니라 공화국에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다.”

연설 말미에 한마디 덧붙였다.


“코시모는 정부에 막대한 돈을 빌려줬다. 또 가난한 시민과 용병에게도 돈을 빌려줬다. 행정적인 도움이 필요한 무지한 시민들에게 도움을 줬고, 성직자에게 선물을 줬다. 그를 추방하려면 친절하고 관대한 사람을 추방하는 법률이라도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중도파는 변화를 지연시킬 수 있었을 뿐이다. 중도파를 이끌던 우차노가 살아 있을 때까지 코시모는 추방당하거나 살해의 위협 없이 그런대로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우차노가 사망하자 매파가 득세하며 코시모를 위협했다(1431년). 이런 와중에 하필 메디치 저택이 있는 지역(San Giovanni 지구)에서 밤에 귀가하던 매파 당원이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권력을 잡은 매파는 통행금지를 실시하고, 집에 낯선 손님이나 군인을 재울 수 없게 했다. ‘8인의 비밀경찰(Otto di Guardia)’ 조직을 결성해 감시를 강화했다. 결국 매파는 코시모를 시청사로 소환해 감옥(피렌체 시청사 탑 아래에 Alberghettino라 불리는 방)에 가뒀다. 죄목은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려 시민을 선동하고 공화정을 파괴하려 했다는 것이다. 매파는 내부적으로 코시모에게 사형을 선고하기로 결정했다. 추방만으로는 해외에 재산이 많은 메디치은행을 파산시킬 수 없기 때문이었다.


코시모가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메디치 가문 고향(Mugello)에서 조직된 3000여명의 농민군이 피렌체 외곽에 포진했다. 메디치은행에서 거금을 빌린 용병대장 ‘토렌티노(Niccolo da Torentino)’는 전쟁터로 가던 군대를 이끌고 피렌체로 말 머리를 돌렸다. 이 사실을 안 코시모는 간수에게 돈을 쥐여주고 급하게 전갈을 보냈다.

“장군 토렌티노, 그리고 아우 로렌초야! 무력으로 혁명을 일으키지 마라. 결국에는 우리에게 피해가 돌아올 것이다. 선한 의도로 그리하겠지만, 너희들 행동이 나를 죽게 만드는 것이다.”


코시모를 지지하는 군대와 내전에 휩싸이는 상황을 두려워한 매파는 코시모와 가족, 친구들을 10년 동안 추방하는 결정을 내린다(1433년 9월 11일). 이제 피렌체에는 메디치은행 도움 없이 존속할 수 있느냐 하는 시금석의 무대가 펼쳐진다.

코시모의 귀환 장면.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그림, 팔라초 베키오 내 코시모의 방.
▶메디치 가문 추종자의 리더십

▷역사적인 사회 진화 과정 받아들여야

베니스로 추방당한 코시모는 베니스 정부에 3만듀캣(Ducat·베니스금화)을 대출해줬다. 마침 베니스 출신 교황 에우제니오 4세(Eugenius IV)가 로마 토착귀족 위협으로 로마에서 쫓겨나 피렌체에 머무르고 있었다. 교황은 로마 교황청으로 돌아가기 위해 메디치은행의 돈이 필요했다.


한편 추방당한 지 1년이 지나자 피렌체에 메디치 가문에 우호적인 정부가 들어섰다. 돈이 필요했던 교황의 적극적인 중재와 메디치 가문에 우호적인 정부의 결정으로 추방당한 지 1년 만에 코시모와 두 아들은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귀국할 수 있었다(1434년 10월 5일). 토착귀족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기 바빴다.

메디치 가문이 귀국할 수 있었던 배경은 돈이 전부가 아니다. 코시모가 겪은 추방과 귀환이라는 격변기 상황 속에서 메디치 가문 추종자들이 우리 정치에 던지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첫째, 토착귀족이 중심이 된 매파는 정점을 지나 쇠퇴하는 가문이 주류였다. 반면 메디치 가문 추종자들은 이제 막 상승하는 신흥 상인이었다. 쇠퇴해가는 정파가 상승 기운을 탄 정파를 이길 수 없는 현상은 필연적인 사회 진화 과정이다.

둘째, 메디치 가문 추종자들은 지원받을 후견인이 없었기 때문에 동료끼리 의지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래서 하나의 목적 아래 단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권력에 취해 오만해진 토착귀족은 서로 질시했고 이해관계가 다양해 하나의 목적으로 단합하지 못했다.

[성제환 석좌교수·JB문화공간 대표]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41호 (2020.1.8~2020.1.14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