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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태의 시사철] 中의 어려움이 우리의 어려움? 어리석은 이타주의는 이기주의보다 나빠

바람아님 2020. 3. 14. 17:51

(조선일보 2020.03.14 노정태 철학 에세이스트)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철]

中의 어려움이 우리의 어려움? 어리석은 이타주의는 이기주의보다 나빠

아리스토텔레스·묵자 철학에서의 이타주의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영화 '범죄와의 전쟁'의 한 장면. 세관원 출신 건달 최익현(최민식)은 매제인 태권도장 관장

김서방(마동석)에게 자기 밑에서 일하라고 요구한다.

매제는 깡패짓 하고 싶지 않다고 버티는데, 그에게 매형이 쏘아붙이는 한마디.

"아이고, 아이고, X랄 한다 X랄해. 이 이기적인 XX야! 니 새끼도 니처럼 살게 놔둘래? 응?

적어도 니 새끼는 남들한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폼나게 살아야 할 거 아이가?"


이 장면에서 관객들은 웃는다. 왜일까?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뒤집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이타주의를 좋은 것으로, 이기주의를 좋지 않은 것으로 막연히 생각한다.

그런 우리에게 최익현은 묻고 있는 것이다.

너 혼자만의 당위적 입장을 앞세워 가족이 경제적 곤궁에 시달리게 내버려둔다면 그것은 이기적인 선택 아니냐고.


물론 "가족을 위해 깡패짓을 하는 것은 이타적인 행동이다"라는 주장은 궤변이다.

그런 사고방식은 이타주의가 아니라 '가족 이기주의'라고 부른다.

하지만 최근 우리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에 대한 통념을 되짚어볼 필요를 느끼고 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감염증 대응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이타주의를 표방하고 실천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어려움이 곧 우리의 어려움이다.' 문 대통령의 발언은 매우 신선했다.

국제정치라는 살벌한 투쟁 현장에서 이토록 명료하게 이타주의를 선포하는 국가 지도자는 흔치 않다.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벌어질 마스크 대란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중국에 마스크를 보내기까지 할 때

그 놀라움은 두 배가 됐다. 우리 대통령은 이타주의를 말만 하는 게 아니라 실천까지 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단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나라'에 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묵자 철학에서의 이타주의

일러스트= 안병현


이게 전적으로 대통령 탓이라고, 그의 이타주의 때문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성급한 판단일 것이다.

하지만 청와대가 중국과 북한을 향해 보여주는 태도는 분명히 이타적이다.

한국 국민이 사용하기에도 부족한 마스크를 중국에 보냈다는 것은 이미 확인된 사실이고, 북한과 물밑 접촉을 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3·1절 기념사에서 대통령이 직접 '북한과 보건 협력을 바란다'고 했으니,

실무자들이 그러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이 문제적 현상은 실로 철학적이다.



철학의 역사에서 이타주의는 그다지 비중 있는 주제가 되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 행위의 궁극적 목적을 행복이라고 정의한 후 그것을

완전히 능가하는 논변이 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기분이 좋고 만족스럽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이 목적으로 삼고 있는 무언가를 추구하여 그 결과를 얻는다는 의미에 가깝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남을 돕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손해를 보지만 결국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자기만족을 얻는다.

이렇듯, 우리가 어떤 목표를 추구하고 있는 한 완전히 이타적인 행위란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내가 손해를 보면서 남을 돕는다'는 목적이 달성되는 것 자체가, 그런 행동을 하는 이에게,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의 행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중국 철학의 전통에서 이타주의라는 주제는 묵자의 '겸애'(兼愛)로 이어진다.

나와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하면 싸움과 전쟁이 벌어질 일 또한 없으며,

결국 모든 이들이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묵자의 주장 역시 엄격한 의미에서 이타주의라 보기는 어렵다.

내 몸처럼 남을 돌보아야 하는 이유가 결국 나를 포함한 모든 이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이라면,

그것은 이기적인 목적을 내포하고 있는 것일 테니 말이다.


우리는 완벽하게 이타적인 존재일 수 없다.

남에게 도움이 되는 결과를 추구함으로써 스스로 행복을 달성할 수 있을 뿐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우리는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나'의 모습에 나르시시즘적으로 도취해서는 안 된다.

남을 돕는 행동은 선한 것이며 권장할 만하다. 하지만 스스로 위험에 빠뜨리고 가족과 주변인을 괴롭게 하는 지경에

이른다면 그것을 선행이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철학뿐 아니라 '이웃 사랑'을 강조하는 기독교를 포함해 그 어떤 종교에서도 그런 식의 이타주의를 권하지 않는다.

직장을 그만두고, 가정생활을 포기하고, 모든 재산을 갖다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은 사이비 종교에서나 하는 짓이다.

겸애를 외치고 비공(非攻), 즉 전쟁 반대를 주장한 묵자 역시 약소국이 침략당할 때는 기꺼이 힘을 보태 싸웠다.

겸애, 이타주의, 그 모든 선량한 목적을 달성하려면 일단 살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돌보지 않는 자가 남을 돌볼 수는 없다. 북한에서 마스크 지원을 요구했지만

한국에서 재고 부족을 이유로 거부했다고 요미우리신문이 보도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문 대통령과 청와대의 북한을 향한 이타주의적 성향을 놓고 볼 때, 줄 수 있다면 당연히 줬을 것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질병관리본부의 희망과는 다르게,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중국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하던 그 무렵,

들어오는 사람들을 막는 대신 가지고 있었어야 할 마스크를 내보냈다.

내 코가 석 자여서 남을 도울 수가 없는 것이다.

중국으로부터의 입국 금지에 대해,

야당 대표들과 만난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초기라면 모를까 지금은 실효성이 없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초기에는 실효성이 있었다는 말인가? 역학적 연구와 판단에는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하지만 그 '초기'에 대통령이 국민을 '이기적'으로 보호하는 대신, 중국에 '이타심'을 뽐내고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페스카마호에서 선상 반란을 일으킨 조선족 선원의 인권을 위해 싸우던 변호사 시절, 문재인의 이타주의는

독특한 빛을 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그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범죄와의 전쟁'에서 최익현이 설파한 가족 이기주의에 동의하지 않지만,

이런 시국에 대통령의 의중에 '국가 이기주의' 아닌 무언가가 있어서는 곤란하다.

어리석은 이타주의는 이기주의보다 더 나쁘다.

'선량한 나'에 탐닉한다는 점에서 평범한 이기주의보다 더 이기적인 것이기도 하다.

남을 돕기 위해, 먼저 스스로를 돕는 나라의 국민으로 살고 싶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3/13/202003130198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