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숙 ‘화외소거’ 132.4×53.3㎝, 종이에 연한 색, 국립중앙박물관 |
북송(北宋) 때 얘기다. 낙양에 살고 있던 사마광(司馬光·1019~1086)은 자신의 별서(別墅·별장)에서 소옹(邵雍·1011~1077)과 만나기로 약속했다. 대정치가 사마광은 편년체 역사서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편찬, 북송 고전문화의 발달에 큰 역할을 한 명사였다. 아무나 함부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소옹도 사마광 못지않게 낙양에서 이름이 알려진 학자였지만 은자(隱者)였다. 명리에 목숨을 거는 시정잡배가 아닌 만큼 마음이 움직여야 몸이 따라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소옹이 사마광을 만나기로 했다. 신분 고하를 떠나 둘의 마음이 통했음을 알 수 있다. 사마광은 즐거운 마음으로 소옹을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렸다. 시간이 흘러 술상 위의 안주가 다 식었다. 소옹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사마광이 싫었던 것일까? 한데 바람맞은 사마광은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짐작된 바가 있어 빙그레 웃으며 시 한 수를 읊조렸다.
옅은 해 짙은 구름에 가렸다 다시 열리고
(淡日濃雲合復開)
푸른 숭산 맑은 낙수 저 멀리 둘러 있네
(碧嵩淸洛遠縈回)
숲 속 높은 누각에서 바라본 지 오래건만
(林間高閣望已久)
꽃 밖에서 작은 수레는 아직도 오지 않네
(花外小車猶未來)
- 사마광 ‘약소요부부지(約邵堯夫不至)’ 중에서
꽃 밖에서 작은 수레는 아직도 오지 않네
소옹은 어디로 간 것일까? 소옹은 이곳에 있었다. 꽃구경 간 것이다. 중요한 사람과의 약속도 잊은 채 소옹이 찾아간 곳은 산비탈이다. 매화꽃이 피어나는 봄날이다. 아직 덜 여문 햇살이 머뭇거리며 꽃 속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반해 작은 수레를 탄 소옹이 경사진 비탈을 지나간다. 동자는 가파른 비탈에서 주인이 탄 수레를 미느라 등이 굽을 지경이다. 대각선으로 배치된 언덕은 물기를 잔뜩 머금은 습윤한 붓질로 처리하였다. 봄 기운이 파고들어 헐거워지는 자연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려 함이다.
언덕 위에 핀 홍매, 백매는 선이 두드러진 구륵법과 선을 완전히 배제한 몰골법을 섞어서 썼다. 고목과 새로 돋아난 어린 줄기를 대비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에 반해 인물과 수레는 꼼꼼한 선으로 분명하게 그렸다. 흙과 나무가 계절의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하며 하루가 다르게 변신하는 것과 달리 관찰자적 입장에 있는 사람은 그다지 큰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다. 눈부시게 변신하는 자연의 생명력을 통해 마음속의 동요만이 있을 뿐이다.
유숙(劉淑·1827~1873)은 ‘화외소거(花外小車)’라는 제목으로 그린 그림 속의 인물과 배경을 사선으로 배치함으로써 소옹이 꽃을 찾아 계속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용한 듯 보이나 더 이상 조용함의 세상에 속하지 않은 봄의 꿈틀거림도 전해주고 싶었으리라.
작은 수레를 탄 위대한 영혼
짐작하셨겠지만 유숙이 그림 제목을 ‘화외소거’라 붙인 것은 사마광의 시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화외소거(花外小車)’는 ‘꽃 밖의 작은 수레’라는 뜻인데 사마광이 바람맞고 시를 지은 이후 소옹을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다. 그러나 ‘소거(小車)’는 사마광이 시어(詩語)로 차용하기 훨씬 전부터 소옹의 ‘닉네임’으로 쓰여지고 있었다.
소옹은 시호(諡號)가 강절(康節), 자는 요부(堯夫)이며 호는 안락선생(安樂先生)이다. 그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낙양에 은거하며 강학을 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으며 수학자였고 역학자였으며 철학자였다. 인품이 훌륭하여 주돈이(周敦頤), 정호(程顥), 정이(程頤), 장재(張載), 사마광(司馬光)과 함께 북송을 대표하는 ‘육현(六賢)’이라 불리며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사람들은 사마광의 시 구절을 딴 ‘화외소거(花外小車)’와 자(字)를 넣은 ‘요부소거(堯夫小車)’라는 화제(畵題)로 그에 대한 존경심을 형상화하였다.
‘소거(小車)’는 소옹의 청빈하고 소박한 삶의 모습을 상징하는 단어다. 제목은 다르지만 두 가지 그림 형식 모두 봄가을이 되면 소옹이 동자가 끄는 작은 수레를 타고 꽃구경 가는 모습을 공통적으로 그렸다. ‘소거’를 탄 채 꽃구경하는 선비의 모습은 소옹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그는 비록 화려한 마차나 말 대신 작은 수레를 타고 다녔지만 선비들은 앞다투어 그를 맞이했다. 동네 아이들과 하인들도 그의 방문을 기뻐하며 자랑스러워했다. 중요한 것은 외양이 아니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느냐는 것이다. 소옹은 작은 수레를 타고 다녔지만 위대한 영혼이었다. 작가들이 경쟁적으로 소옹의 이야기를 화제로 그린 것은 그에 대한 존경심이 작용해서다. 그림을 보며 자신도 소옹처럼 살고 싶다는 소망을 꿈꾸고 기어이 그렇게 살겠다고 다짐하기 위해서다.
‘화외소거’나 ‘요부소거’라는 제목으로 소옹의 이야기를 남긴 작가는 혜숙을 비롯하여 정선(鄭敾), 김홍도(金弘道), 양기성(梁箕星), 장승업(張承業) 등을 들 수 있다.
신뢰가 쌓여야 이해받을 수 있다
다시 사마광이 앉아 있는 별장으로 돌아가 보자. 사마광은 소옹에게 바람을 맞았다. 그러나 자신과의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린 소옹에 대해 전혀 서운한 감정을 갖지 않았다. 그러려니 했다. 소옹이라는 사람의 인간 됨됨이를 신뢰하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소옹은 매사에 걸림이 없는 사람이었다.
소옹은 자평(自評)하기를 “천함도 가난함도 없고 부유함도 귀함도 없고 보냄도 맞이함도 없고 얽매임도 거리낌도 없다. 온 세상의 봄을 거두어 마음속에 간직했다”고 했다. 이 정도 된 사람이었기에 설령 약속을 어겼어도 이해받을 수 있었다.
소옹과 사마광의 얘기가 아무리 그럴 듯하게 들려도 소옹의 행위를 함부로 따라해서는 안된다. 소옹의 행동이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평소의 생활 태도가 현자(賢者)의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누가 곁에 있든 없든 자신이 정한 원칙에 따라 생활했다. 이런 일화가 전한다. 어느날 친구가 달밤에 소옹을 방문했는데 밤이 깊었어도 등잔불 아래에서 옷깃을 바르게 여미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고 한다. 안과 밖이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주희(朱熹)는 소옹을 흠모하여 “손으로는 달 속의 굴을 더듬고 발로는 하늘의 맨끝을 밟는” 사람이라고 칭송했다.
평소에 신뢰를 받지 못한 사람이 중요한 사람과 약속해놓고 일방적으로 약속을 어기면 어떻게 될까. 약속을 헌신짝 버리듯 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옛사람의 삶의 방식을 모방하려면 먼저 본질을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 대학원, 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거침없는 그리움’ ‘꿈에 본 복숭아꽃 비바람에 떨어져’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우리나라 대표 그림’ ‘그림공부, 사람공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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