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고전·고미술

[ 그림, 詩에 빠지다]소년이 백마 타고 호희의 술집으로 들어가네-이백 소년행

바람아님 2014. 2. 11. 23:42
 소년의 나들이(少年行)
이백(李白)

오릉의 소년들 금시 동쪽을 지날 때(五陵年少金市東)
은안장 백마 타고 봄바람을 가르네(銀鞍白馬度春風)
떨어진 꽃 짓밟고서 어디로 놀러가나(洛花踏盡遊何處)
웃으면서 들어가니 호희의 술집이네(笑入胡姬醉肆中)
▲ 이인문 ‘소년행락’, 비단에 연한 색, 21×27.5㎝, 간송미술관
    이백(李白·701~762)의 시 ‘소년행(少年行)’을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이인문(李寅文·1745~1821)이 붓으로 형상화했다. 화면의 중심에는 봄 기운에 마음이 들뜬 젊은이가 말을 달리며 다리를 건너고 있는 게 보인다. 화면은 온통 봄색이다. 혈색 좋은 복사꽃과 버드나무가 강줄기를 따라 끝없이 심어져 있다. 푸르스름한 산 아래 보이는 금시(번화가)가 젊은이가 가고자하는 술집이 있는 곳이리라. 금시에 있는 호희(胡姬)의 술집에 가면 푸른 눈의 이국적인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 젊은이의 마음이 바쁘다. 
   
   
   은안장에 백마 타고 젊은이가 찾아간 곳
   
   이인문은 산뜻한 봄날의 정경을 그리면서 나무가 만들어놓은 공간 안에 주인공을 배치하는 전통적 구도를 활용했다. A4용지만 한 크기의 화면이 별로 좁다고 느껴지지 않은 것은 전경(前景)과 후경(後景) 사이의 수면을 넓게 비워 놓았기 때문이다. 경물(景物)의 배치도 안정감을 고려했다. 버드나무와 복사꽃으로 무게가 기울어지지 않도록 인물을 그리면서 다리를 세웠다. 다리는 시에는 등장하지 않는 보조장치다. 시의도(詩意圖)는 시를 소재로 그린 그림이지만 시 자체에 매달려 끌려가는 그림은 아니다. 언어가 평면으로 변환될 때의 장점과 단점을 충분히 고려한 후 그려진다. 시에는 시의 언어가 있듯 그림 또한 그림만의 시각 언어가 있다. 화가는 시에서 읽은 시의(詩意)를 자신만의 회화적 언어로 화폭에 옮긴다. 감상자가 그림에서 시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수 있도록 색채와 경물을 통해 시의 이미지를 구체화한다.
   
   이 그림의 화제(畵題)인 ‘소년행락(少年行樂)’은 운수산초(雲水山樵) 배성식(裵成植)이 이백의 시 ‘소년행’을 그림 옆 별지(別紙)에 적어 놓아서 붙여지게 되었다. 배성식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이백의 시를 곁들였다고 해서 이 그림이 이백의 시를 그린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림 속에는 ‘고송유수관도인’이라는 이인문의 호만 적혔을 뿐 다른 아무런 화제도 적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작품은 김홍도(金弘道·1745~?)가 그린 ‘소년행락’과 친연성이 있어 혹시 배성식이 자의적으로 판단한 것이 아닐까 의심된다. 김홍도의 ‘소년행락’은 이인문의 작품과 흡사한 소재를 그렸으면서도 화제는 다른 작가의 것이기 때문이다.
   
   
   장대에서 버들을 꺾다
   
   수양버들 두 그루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앞쪽의 나무는 조금 진하게, 뒤쪽의 나무는 조금 성글게 그려 변화를 주었다. 능청거리는 수양버들 아래 백마를 탄 젊은이를 배치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잘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인물의 존재감은 미미하다. 버들가지와 들풀은 진한 연두색으로 그려 봄날의 정취를 드러냈다. 같은 듯 다른 미묘한 봄색의 차이를 크고 작은 태점으로 그렸다. 나무에 썼던 짙은 검은색은 백마의 말갈기와 꼬리를 거쳐 ‘춘일로방정(春日路傍情)’이라는 화제(畵題)를 쓰고 나서야 마무리되었다. 그림은 이인문의 ‘소년행락’과 비슷한데 화제는 아니다. 김홍도는 누구의 시를 화제로 삼았을까. 시를 살펴보자.
   
   ‘산호 채찍 버리니(遺却珊瑚鞭)
    백마가 가지 않네(白馬驕不行)
    장대에서 버들을 꺾으니(章臺折楊柳)
    봄날 길가의 정취로다(春日路傍情)’ 

   
김홍도 ‘소년행락’, 종이에 연한 색, 26×21.8㎝, 간송미술관

 이 시는 당 시인 최국보(崔國輔)의 ‘소년행(少年行)’ 마지막 구절이다. 장대(章臺)는 한(漢)나라 때의 거리(街) 이름으로 술집이 많은 동네로 유명했다. 이백의 시에서 언급한 호희의 술집과 같은 의미다. 산호 채찍을 들 만큼 부유한 집 자제들이 채찍 대신 버들가지를 꺾는다. 버들가지는 술집에서 손님을 끌기 위해 심어놓은 나무다. 그 버들가지를 꺾었다니 의미심장하다. 김홍도는 그림 속에 말을 탄 젊은이가 버드나무 곁을 지나는 모습을 그리는 것으로 장대가에 와 있음을 암시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림만으로는 젊은이가 장대가에 와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승마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런 애매함을 일시에 해결해주는 것이 ‘春日路傍情’이라는 화제다. ‘봄날 길가의 정취’라는 시구절을 적어 놓자 평범해 보이던 버들가지는 젊은이를 향해 유혹하듯 흐느적거리는 장대가의 질탕함을 상징하게 된다. 그 유혹이 얼마나 강했으면 봄날만 되면 젊은이를 불러들여 버들을 꺾게 할까. 감히 거절할 수 없는 독한 유혹을 김홍도는 버드나무와 화제에 진한 색을 칠해 표현했다. 화제 한 구절로 그림 ‘읽는’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노련한 계산이다. 시보다 더 시적인 그림이다.
   
   이백과 최국보가 같은 제목의 시를 썼듯 이인문과 김홍도도 같은 화제로 그림을 그렸다. 같은 소재로 쓴 시가 비슷하면서도 다르듯 그림 또한 마찬가지다. 이인문은 이백의 시에서 떨어진 꽃을 짓밟을 정도로 급히 가는 인물에 꽂혀 붉은 꽃을 그렸다. 김홍도는 최국보의 시에서, 장대에서 버들을 꺾는 모습에 꽂혀 버드나무를 크게 부각시켜 그렸다. 비슷한 것 같은데 자세히 보니 다르다. 그러고 보니 이인문의 그림 옆에 이백의 시를 적어놓은 운수산초 배성식이야말로 시와 그림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 아닌가. 그림을 깊이 보는 즐거움이 호희의 술집을 찾는 젊은이의 들뜸 못지않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 대학원, 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거침없는 그리움’ ‘꿈에 본 복숭아꽃 비바람에 떨어져’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우리나라 대표 그림’ ‘그림공부, 사람공부’